아니, 듣고 싶어요
특급호텔에 오는 사람들은 그들이 입는 옷이나 구두의 브랜드, 엑세사리 같은 것들로 자신의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를 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오산이다. 호텔리어들은 그런 것을 보지 않는다. 겉이 아니라 몸안에 입혀진 것을 본다. 발을 힘차게 뻗는지 작게 구르는지, 구두에서 나는 소리가 가벼운지 무거운지, 몸을 어느 정도 흔들며 걷는지, 걸을 때 손을 어디에 두는지, 가방은 꽉 닫혔는지 조금 열렸는지.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배려심, 나태함, 외향성 같은 걸 나타내는 레퍼런스다.
<백 오피스> 최유안
직장에서 5년이 넘도록 고수하고 있는 나만의 소소한 루틴이 하나 있다. 일명 '주 1회 평일 오전 한 번은 꼭 쉰다'는 루틴인데, 탄력근무제라 시간 연차를 잘만 끊어서 사용하면 1년 동안 매주 한 번씩은 쉴 수 있다. 이 루틴 덕분에 월요병도 사라졌고, 일상의 작은 틈이 생긴 기분이다. 이번 주도 마찬가지였다. 감사 준비로 계속 바쁘지만 이 루틴만은 지키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청소와 운동을 마치고,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샐러드 가게로 향했다. 항상 앉았던 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뒤에 앉은 손님들의 목소리가 유독 날카로웠다. 다행히 나와 등지고 있어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지만, 매장이 작아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타인들의 사적인 이야기가 낱낱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주문한 메뉴를 받고 자리에 앉아 샐러드를 먹으려 하는데도 노부부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격양되며 언성을 높여가고 있었다. 포크로 샐러드를 한 입 넣고, 귀를 막았다가 다시 또 한 입, 다시 또 귀를 막는 행위를 반복했지만 소용없었다. 단순히 소리 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날선 단어들이 문제였다. 이 글에 욕을 쓰고 싶지는 않아서 초성만 살짝 언급하자면 비읍과 시옷이 반복적으로 들렸다. 할머니는 말끝마다 할아버지에게 "으이그, 이 ㅂㅅ아"라고 하셨다. 아무리 귀를 막아도 내 손을 뚫고 들려오는 그분들의 목소리 덕분에 대략적인 상황도 파악됐다. 이곳은 대학 병원 근처에 있는 샐러드 가게인데, 검사를 받으러 오셨다가 할아버지 실수로 검사 일정이 틀어진 게 문제의 발단인 것 같았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까지 사람을 멸시할 일인가 싶었다. 할아버지가 병원 측과 통화하는 중에도 할머니는 연신 욕을 하거나 할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낮춰서 통화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치셨다(할머니 목소리가 훨씬 더 시끄러운데, 누구더러 목소리를 낮추라는 건지 원). 병원 교수님들과도 서로 친분이 있는 것 같았고, 이분들의 사회적 지위도 제법 높으신 것 같았는데, 직업이나 학식과는 별개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예절은 어디 다른데 두고 오셨나 보다. 더 소름이 돋았던 건 대화 도중 걸려온 전화를 받는 할머니의 태도 때문이었다. 택배 기사님의 전화인 것 같았는데, 할아버지에게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온갖 험한 말을 다 쏟아내시더니 "네, 기사님"이라고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하시는 게 아닌가.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주소지를 말씀하실 때도, 청담동에 살고 있다는 걸 이 가게 모든 손님들에게 자랑하고 싶으셨던지 그 세 글자를 또박또박 스타카토처럼 여러 번 반복하셨다. "네, 기사님. 제가 지금 밖에 나와있어서요. 청! 담! 동! OO 앞에 두고 가세요. 네, 청!담!동!이요. 제가 거기 살거든요."
아이고, 머리야. 샐러드의 야채들을 아무리 소분해서 먹어도 얹힌 느낌이 들었다. 애꿎은 샐러드만 우적우적 씹으며 괜찮다고 연신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이대로 계속 먹었다가는 회사로 복귀해서 먹은 음식을 다 게워낼 것 같았다(소화기가 좋지 않은 편이다). 결국 참다못해 숟가락과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그분들을 쳐다봤다. 할머니는 나의 시선 따위는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셨는지 점점 더 언성을 높이며, 할아버지를 구박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무슨 말이라도 좀 하려고 하면 그 말을 막으면서 디귿과 치읓까지 반복하셨다. 옷도 곱게 잘 차려 입으시고, 나이도 지긋하신 것 같았는데 존중과 배려는 덜 배우셨나 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아 아니다. 내가 뭐라고 이런 판단을. 그냥 피하는 게 낫지.
그렇게 체기를 가라앉히며 도망치듯 가게를 나왔다. 예보상으로는 화요일도 기온이 낮다고 했지만 햇살이 강해서 그런가 걷기에 괜찮은 날씨였다. 아니다. 실은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도저히 걷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화가 난 것도, 서글픈 것도 아닌 심정으로 터덜터덜 회사를 향해 걸었다. 시끄러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싫은데, 이건 단순히 시끄러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죄송한데, 조금만 조용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고 싶었다가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정확히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마세요!"라고. 내가 가장 속상했던 건 할아버지의 태도였다. 할머니가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지독한 말을 해도, 아무런 저항 없이 던져지는 감정을 묵묵히 받아내고 계셨던 그 모습. 맞서 싸우지 않고 주눅 든 채 행여나 상대방을 더 자극하지 않을까 싶어 조심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더 아프게 했다. 젊은 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엄청 큰 죄라도 지으셨던 걸까. 그래서 연세가 지긋하신 지금 그 복수를 당하고 계신 걸까.
나이를 먹는다고 다 어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어떤 어른은 말 한 마디로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고, 어떤 어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다가오게끔 한다. 요즘 읽고 있는 올해의 두 번째 벽돌책 <호라이즌>의 문장이 스쳐가듯 떠오르기도 했다.
그 어른들은 생명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주변 모든 생명에 대해 온화한 감정을 품고 있으며, 감정이입의 그릇이 남달리 큼지막하다. 그들은 다른 성인들보다 훨씬 더 다가가기 쉬우며, 아이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이를 낮추어 보거나 아기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가 느끼는 경이의 감각을 인정하고 북돋운다. 마지막으로 어른들은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기꺼이 평범한 삶 속으로 스며든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며 주변 사람들도 그들이 누구인지 안다.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하지만 생각은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도 어느 순간 가까운 이들에게 가깝다는 이유로, 편해졌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되면 어쩌나 싶었다. 곁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로 삼자고 마음먹었다. 그분들의 사정을 다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더 쉽게 판단하는 것도 이제 그만 멈춰야겠다. 그냥, 그냥 나나 잘하자. 남의 이야기를 엿듣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리 귀를 막아도 손을 뚫고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애꿎은 남의 사생활을 알아버린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제 화요일 루틴은요?
어디 가버린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