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시간에 회사 동료 또는 선후배와 담소를 나누며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이 '요즘 뭐 하니?'인 것 같습니다. 때론 업무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지만 점심시간만큼은 회사 밖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모두 비슷할 텐데요. 그래서 '요즘 뭐 하고 지내?'라는 질문은 참 특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는 퇴근 후의 자투리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같은 질문에 지난 주말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하니까요.
천경자, <사군도>, 1969 ⓒ 아보퓨레
직장인의 대화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이들이 주로 새로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저번에 시작한 그것을 꾸준히 지속하는 도전기를 공유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꾸준히 오랜 기간 해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속이 갖는 강력한 힘을 몸소 깨닫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전시 ⓒ 아보퓨레
5년, 아니 10년 전의 저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영어도 잘하고 싶고, 책도 많이 읽고 싶고, 달리기도 잘하고 싶고, 영화도 많이 보고 싶어 했던 제가 등장합니다. 아 참, 악기도 하나 다루고 싶고 와인이나 미술에 대해 해박해지고 싶기도 했죠. 가만히 있는 성격은 아니라 여러 가지 도전과 시도를 무수히 해왔습니다. 주말 영어회화 학원이나 전화영어도 해보고, 러닝 크루도 들어가고, 피아노 학원도 다녀봤죠.
최재은, <Meeting the Morning Dew>, 2023 ⓒ 아보퓨레
그래서 지금, 어떻냐고요? 대부분은 실패했지만 다행히 몇 가지는 여러 해 동안 박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주에 두 번 정도 장거리 러닝을 하고, 하루에 몇 페이지라도 고전을 챙겨 읽습니다. 이렇게 간혹 글도 끄적이고요. 주말이 오면 규칙적으로 전시회를 찾아다니니 이 정도면 저라는 사람의 한도는 다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알폰스 무하의 작품이 에나멜 페인팅 된 예거르쿨트르의 리베르소 워치, 출처: 예거 르쿨트르
몇 가지에 대한 꾸준함 덕분일까요? 근래 재미있는 일이 많아졌다고 느낍니다. 특히 회사 업무에 좋아하는 활동을 접목시켰을 때는 성덕이 된 기분마저 들더군요. 일례로 시계 바이어 시절 하이엔드 워치 제품들 중 명화를 에나멜 페인팅 한 상품들을 모아 기획전을 진행했을 때 너무 신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출장 갔을 때 미리 찜 해놨던 알폰스 무하의 시계를 전시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니키 드 생팔, <Adam and Eve>, 1985 ⓒ 아보퓨레
불가리를 보고 있자면 요즘 저와 같은 재미를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는 불가리는 예술에 진심인 브랜드입니다. 그것도 아주 꾸준히 말이죠. 한국을 대표하는 화랑인 국제 갤러리와의 콜라보인 이번 '세르펜티 75주년' 기념 전시회만 봐도 마음가짐이 다름을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국제 갤러리에는 국내 여성작가 선정 및 작품 큐레이팅을 맡기고, 불가리는 두 손 걷어붙이고 직접 니키 드 생팔의 작품을 공수해왔습니다. 미국 니키 자선에술재단에서 작품을 공수해 온 불가리가 한국에 도착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죠. '나 불가리, 국제갤러리와의 협업을 통해 아트 러버로서의 진정성을 보여줄 테야!'
자하 하디드와 콜라보한 불가리의 '비제로원' 컬렉션, 출처: 불가리
사실 불가리의 주얼리 제품을 통해서도 진정성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릴까 하는데요. 먼저 타임리스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비제로원' 컬렉션입니다. 우리에게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건축가로 잘 알려진 자하 하디드와의 콜라보 제품이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주얼리 브랜드답게 이태리의 아이코닉 건축물인 콜로세움을 모티프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자하 하디드는 본인의 해체주의 스타일로 콜로세움의 곡선과 그 사이로 비추는 공(空)의 공간을 만들었고, 덕분에 그녀의 작은 반지는 마치 하나의 건축물을 보는듯한 인상을 자아냅니다.
안도 타다오와 협업하여 만든 불가리의 옥토 피니시모 워치, 출처: 불가리
또 다른 제품은 노출 콘크리트의 대가, 건축가 안도 타다오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손목시계입니다. 비제로원과는 다르게 한정으로 기획된 프로젝트이므로 제품보다는 작품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초침의 중심부터 퍼져나가는 파동. 물의 요소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안도의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뮤지엄 산에 놀러 가 잔잔한 수변에 조약돌을 무심하게 툭 던져놓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요. 동심원의 끝에는 차디찬 팔각의 콘크리트 모서리가 가닿는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답게 경이롭게 날카로운 모서리겠지요.
아니쉬 카푸어와 협업하여 만든 불가리의 비제로원 반지, 출처: 불가리
마지막으로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욕심쟁이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와의 협업 제품입니다. 아니쉬 카푸어는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를 활용해 주변 환경과 호흡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작가죠. 흥미로운 점은 하이주얼러들은 스틸 소재로 주얼리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스틸 애호가와의 협업이 불가리에게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불가리는 스틸을 받아들이되 그들의 최상급 세공 능력으로 소재가 가진 아름다움을 배가시켰습니다. 환상적인 굴곡의 미러폴리싱 기법(거울처럼 반짝이는 마감기법)으로 세공된 반지는 나와 주변 사물들을 자유롭게 반사시켜 착용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사합니다.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전시 ⓒ 아보퓨레
이렇게 예술에 진심인 불가리의 아트 콜라보 사례 중 저의 최애 세 작품을 소개해 드렸는데요. 아마 여러분도 저처럼 불가리의 진심을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만약 7월 중 시간이 되신다면 불가리 전시회를 방문해 보시면 어떨까요. 바닥의 뱀 사이니지를 차분히 따라가며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여름의 더위는 이내 잊게 되실 것입니다.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전시 ⓒ 아보퓨레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전시 국제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54) 2023.06.23~07.31 무료 전시(네이버 예약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