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J와 K를 만났다. J는 자타 공인 모범생이었다. 성적도 우수했고 꼼꼼한 성격에 리더십도 갖춘 그는 누구나 예상했던 대로 반장이 됐다. 나는 부반장이 되면서 그와 친해졌다. 내가 부반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타 후보들이 반장을 하려다가 J에게 패배를 맛본 후 아쉬운 마음에 부반장 선거에 재출마 했던 반면, 나는 부반장 선거에만 출마하여 '나는 J랑 찰떡궁합을 맞추기 위해 부반장'만'을 하려고 나왔다.'라고 말했던 틈새전략이 먹혔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모범생 J와, 시끌벅적한 나와의 조합으로 우리 반은 가장 공부도 잘하면서 가장 잘 노는 반으로 금세 유명해졌다.
친구들 Les Amis 展 ⓒ 2023. 아보퓨레. All rights reserved.
K는 4차원이었다. J와 내가 반장 부반장으로 인싸 스타일이었다면, K는 너드(nerd)라고 볼 수 있었다. 여름날 그와 짝꿍이 되며 그를 관찰하게 되었다. 그는 대부분의 수업 시간을 본인이 가져온 책을 읽거나 팔을 배고 자는데 할애했다. 어느 날은 아무런 방해가 안되게 자고 있는 그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서로 공부를 해서 긍정적인 자극이 됐으면 좋겠는데, 네가 하루 종일 자니까 내가 좀 답답한 느낌이 들어." K는 미안하다며 그 이후로 잠을 자지 않았다. 대신 그는 책에 더욱 심취해갔다. 주로 무협소설을 읽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더 이상 무협소설을 읽지 않고 다른 종류의 책을 읽길래 물어봤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 자주 가던 책방에 있는 책을 다 읽어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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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학교를 나온 우리의 만남은 서울에서 이어졌다. 대학교 2학년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어느 날 J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 진짜 너무 어이가 없는 일이 있었어."
"뭔데?"
"K가 우리 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나 봐."
그랬었다. K는 수능 성적이 생각보다 안 나오자(그땐 그럴만 했지.) 연락을 끊고 잠행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와 연락할 방법도 없이 어딘가 허전한 대학 1학년을 보냈었다. 그러던 어느날 J는 캠퍼스를 거닐다 K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K에게 전화를 걸었다.(1년 동안 끊겨 있던 K의 전화번호는 다시 살아있었다고 한다.)
"여보세요?"
"어 너 이번에 S대 입학한 K지?"
"네 그런데요."
"너 학교 생활 앞으로 힘들 줄 알아라."
"네? 누구시죠?"
"누구긴 누구야 너 학교 선배이자 고등학교 동창 J지."
며칠 후 J는 K의 목 뒷덜미를 잡고 우리 동네까지 끌고 왔다. 나는 괘씸함에 K의 팔뚝을 몇 대 때렸다. 그리고 우리는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못다 한 이야기를 밤새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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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는 다시 자주 만난다. J는 목포, 울산 등 본인이 선호하는 제조업을 기반으로 커리어를 쌓아 현재 서울 소재 대기업 재무팀에서 근무하고 있고, K는 지방에서 로스쿨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둘 다 제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하고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전시회를 보러 갈 때 불러내 함께 취미생활을 하곤 한다. 이번 '친구들' 전시를 오전 일찍 관람하고 우리는 낮술을 먹으러 갔다. 소맥을 말아먹으며 J가 여자친구가 새로 생긴 이야기, K가 옷을 산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 간 또 멀리 떨어졌다가 다시 만나겠지? 하지만 미래의 이별은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친구라는 건 있다는것 만으로도 소중한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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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Les Amis 展 2023.08.26-11.26 알부스갤러리(한남동) 유료전시(예약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