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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퓨레 Sep 02. 2023

예술가도 남이 시킨 일은 하기 싫다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 라울 뒤피 展]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 라울 뒤피 展 ⓒ 2023. 아보퓨레. All rights reserved.


저녁 10시. 동창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직 야근 중이야...완전 시즌이네. 우리 일요일에 만나기로 했지? 만나면 술 완전 많이 먹어야겠다.' 최근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PT까지 끊었던 친구는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꽤나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듯했다. 남이 시킨 일이니 당연히 하기 싫을 텐데 게다가 큰 프로젝트라니. 당장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 같아서 더 마음이 쓰였다. 무한히 자유로울 것만 같은 예술가들도 우리네 직장인들처럼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이건 아니잖소!"라고 곤조 있게 자신의 생각을 주장했다는 점이 있지만.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 라울 뒤피 展 ⓒ 2023. 아보퓨레. All rights reserved.


화가로 성공한 구스타프 클림트는 1984년 오스트리아 문화교육부와 빈 대학으로부터 빈 대학 강당의 천장화를 그러줄 것을 의뢰받는다. 역사 깊은 빈 대학 측에서는 학문의 힘과 진리의 승리가 표현되길 원했다. 하지만 클림트는 의뢰받은 철학, 의학, 법학 세 가지 천장화에서 학문의 승리가 아닌 학문이 지닌 명확한 한계, 더 나아가 학문의 패배를 짚어낸다. 총 87명의 교수는 클림트의 천장화에 반대 의사를 표했고, 클림트도 스케치를 바꿀 생각이 없다고 3년을 버틴다. 문화교육부 장관이 사임하고 클림트의 교수 임용이 취소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클림트는 작품 의뢰를 없던 일로 하겠다고 선언한다. 더 이상 공공미술은 하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클림트 학부화 <철학>, <의학>, <법학>


마크 로스코는 1950년대 후반 위스키 제조사 시그램으로부터 벽화 창작을 의뢰받는다. 그림이 걸릴 곳은 뉴욕 맨해튼에 새로 지어질 시그램 빌딩 안의 고급 레스토랑 '포 시즌스'였다. 당대 화가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한 기회를 잡았던 로스코는 알고 보면 다소 결이 다른 이유로 청탁을 수락했었다. 평소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경계해왔던 그이기에 과도하게 비싼 식사를 하는 포시즌의 고객들의 밥맛을 떨어뜨릴 작품을 걸 요량이었던 것. 평소 자주 사용하던 밝은 컬러들을 뒤로하고 빨강과 어두운 갈색 물감으로 커다란 캔버스를 채워나갔고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로스코는 여러 여행을 하며 고민을 계속했다. 나의 의도는 그렇다 쳐도 내 작품이 부자들이 밥 먹는 식당 따위에 걸린다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까? 결국 그는 작품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계약금을 돌려주고 자신의 붉고 어두운 그림들을 지켜낸다.

마크 로스코의 시그램 벽화 연작, 출처: http://unurthed.com/2010/07/19/rothko%E2%80%99s-seagram-murals/              


그렇다고 모든 대가들이 고통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라울 뒤피는 1937년 파리 전력 공사로부터 건물 외벽 벽화를 의뢰받는다. 라울 뒤피는 평소 스펀지 같은 흡수력을 지닌 작가로 유명했다.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미술 사조들이 유행할 때마다 그는 빠짐없이 기술들을 연마해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가로 60m, 세로 10m로 당시 가장 커다란 벽화 중 하나를 의뢰받았던 뒤피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전기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퀴리 부인과 에디슨 등 전기의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 111명을 그려 넣는다. 벼락을 내리는 제우스나 그림을 관통하는 커다란 전기의 요정은 이 커다란 그림을 일종의 신성한 종교화로 느껴지게 만든다. 남이 시킨 일을 이 정도로 즐기면서 멋진 성과까지 창출한 걸 보면 뒤피는 오늘날이라면 적어도 임원까지는 무난히 승진했으리라.


라울 뒤피, <전기 요정>, 1937 ⓒ ADAGP, Paris, 2014 Photographe: Kleinefenn


이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토요일 저녁이 됐다. 내일 친구를 만나기로 한 곳은 한남동의 한 갤러리. 좋은 작품들로 마음을 치유하고 낮 술 한 잔 땡겨야겠다.  힘내자 모든 직장인이여. 때론 클림트와 로스코처럼, 때론 뒤피처럼.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 라울 뒤피 展
2023.05.17-09.06
더현대서울(여의도
유료전시(예약 불필요)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 라울 뒤피 展 ⓒ 2023. 아보퓨레. All rights reserved.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전 : 라울 뒤피 展 ⓒ 2023. 아보퓨레.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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