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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제인 May 24. 2023

서핑하러 가자!

가족없는 가족여행


조급한 마음은 화를 부르고

새해가 밝았다. 서른을 갓 넘긴 것도 마흔을 곧 앞둔 것도 아닌 평범한 새해였지만, 이상하게도 조바심이 들기 시작한 해였다. 하고 싶은 것을 지금 시작하지 않는다면 영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말이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시드니로 여행을 간다며 동행을 물어본 것도 그쯤이었다. 망설여졌다. 다만, 늘 젊을 줄만 알았던 내 생애도 이리 짧게 느껴지는데 부모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나 하는 생각이 망설임을 재촉했다. 오빠 내외와 두 조카가 함께한다는 것도 큰 몫을 했다. 독일에 오래 살수록, 함께하지 못한 생일과 기념일 사진 속엔 둘째 딸 내외라는 구멍이 숭숭 나있을 테였다.


그렇게 우리는 시드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호주는 먼 거리만큼 모든게 낯설었다. 영어에 서툰 택시기사와 마찬가지로 영어와 담을 쌓고 지낸 우리가 fifty를 fifteen으로 혼동한 것처럼 말이다. 낯이 두꺼운 택시기사는 6 Km라는 짧은 거리를 달린 후 목적지 앞에서 오십 달러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고, 당연히 십오 달러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지불을 거절했다. 어차피 서로가 오해한 것이니 삼십에서 합의를 보자는 제안에도 택시기사는 이 정도 소란은 예상했다는 듯 트렁크에 실은 짐을 인질로 삼고 고집을 부렸고, 곧 호텔 앞은 시끄러워졌다. 결국 택시기사는 오십 달러 지폐 한 장을 의기양양하게 손에 쥔 채 떠났다. 다음날 시내에서 삼십 분가량 페리를 타고 도착한 맨리(Manly)에 있는 숙소도 예상을 뒤엎었다. 삼각형 지붕을 따라 길게 뚫린 창은 사진 속에서는 분명 근사해 보였지만, 실제론 아침이면 정확하게 침대 머리맡으로 뜨거운 볕이 세모낳게 내리쬐었다. 게다가 용케 좋은 각도에서 촬영해 거대해 보이게 한 수영장은 욕조 두개를 합친 크기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집주인 아들이 매일 학교에 다녀온 후 몇 시간씩 쓰곤 했으니 누구라도 그 앞에서 호기롭게 맥주를 마시며 물장구를 칠 흥은 쉬이 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대와 정확하게 일치한 것도 있었는데, 걸어서 십 분 안에 해변가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오십도 가량의 오르막길이라는 것이 또다시 예상을 빗나갔을 뿐이었다. 그런 우리를 위로해 준 것은 바다였다. 서퍼들의 천국이라는 별명처럼 맨리 해변은 파랗게 모여들었다 다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맞춰 춤을 추는 서퍼들로 가득했다. 서핑에 도전하겠다고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특훈을 하던 나를 남편은 꽤나 신기해했다. 비록 그 특훈이라는 것이 평소 하던 요가를 조금 더 열심히 한 것에 불과했지만, 나는 나름 진지했다. 이번 생애 서핑에 도전하려면 아무래도 이곳이 가장 좋지 않을까? 조급함이 다시 발동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남편은 막 독일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신의 하얀 속살처럼 밝게 웃으며 파도를 즐겼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 웃음기를 가시게 한 것은 바로 나였다. 긴장한 얼굴로 파도와 씨름하던 내가 순식간에 아래로 고꾸라쳤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심이 깊지 않았던 덕에 물 위로 바로 떠오를 수 있었지만, 반대로 수심이 깊지 않았던 탓에 보드가 모래 위로 수직으로 박히며 골반뼈 양쪽에 시퍼런 멍을 남겼다. 쓰린 것이 상처인지 마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은 커녕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뒤였다. 일주일 뒤에 오기로 한 가족들이 시드니행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맨리 해변이 나에게 알려준 것

몇 시간 동안 가족들과 통화를 한 후 내린 결정은, 다음을 기약하자는 것이었다. 미역국을 서른 몇 그릇 먹는 동안 깨달은 건, 인생에는 계획대로 되는게 별로 없다는거다. 심지어는 좋은 의도로 노력했던 것이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기 마련이니. 대화 내용을 남편에게 통역해 주자, 남편은 한편으론 당황한 듯했고 또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다는 듯도 했다. 티셔츠 한 장 사는데도 몇 시간씩 할인상품을 찾는 그가 거액의 비행기 편을 결제하며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던 데는, 가족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간 미루고 미루던 한국어 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도 이번 여행에서 만날 첫째 조카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게 이유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낸들 어떡하겠니’하며 능청을 부렸지만, 속으론 미안함 마음에 뱃속이 꼬여오는 듯했다. 하지만 몇 초 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담장 밖 집주인 가족들이 들을까봐 이내 소리를 낮추어야 했지만, 실소는 그후로도 몇 분 간 계속되었다.


그날 밤엔 호주에 온 후 처음으로 비가 내렸고, 지붕은 빗소리보다 더 세찬 소리를 내며 밤새 울어댔다. 잠을 설친 나는 동이 트기 전 생각 정리도 할 겸 일출을 보러 나가려했다. 그러자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벌떡 일어나 어차피 곧 햇빛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며 너스레를 떨며 길을 따라나섰다. 비가 갠 해변에는 연분홍색 여명이 번지고 있었다. 해변가 입구에서 커피를 사서 전망이 좋은 곳에 놓인 벤치를 찾았다. 따뜻하게 차오르는 햇살과 끝이 없이 펼쳐진 태평양을 보고 있자니 지난밤 웃음과 폭우로도 채 쓸어내리지 못한 채 가슴에 얹힌 무언가가 옅어지는 것 같았다.


여행이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우리는 결코 행운을 마주치지 못할 것이고, 좋은 의도로 한 일이 꼭 좋은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도는 남는다고 깨닫게 한 것이 떠오르는 태양이었는지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 아래에서 묵묵히 서있던 바위였을지도 모른다. 옆을 보니 남편 또한 한결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둠 한 조각도 남기지 않은 채 사위가 밝아오자, 우리는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햇살에 반사된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이십 년 전 스물세 살의 짧은 일기로 세상을 등지며 벤치를 기증한 그가 이곳에 남긴 한마디는, “Let‘s Go Surfing(서핑하러 가자).”이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하는 마음

성장소설과는 달리, 나는 그 후로 서핑 강습에 참가하지 못했다. 깨어난 물공포증이 버킷리스트를 이긴 것이다. 특훈은 커녕 전날 유튜브로 서핑하는 법을 찾아보던 남편은 강습 한 번에 보드 위에 서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에 오기가 생긴 나는 맨리를 떠나기 전날 남편의 도움을 받아 파도가 얕은 곳에서 서핑에 도전했다. 하지만 부서지는 파도와 함께 나아간다는 짜릿한 느낌을 받으려는 찰나 다시 모래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너무 긴장한 탓에 보드를 부서질 듯이 잡느라 앞쪽에 체중이 과하게 실린 탓이었다. 이번에는 무릎에 커다란 피멍을 남겼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손사레치며 물 밖으로 기어 나오니 콧속에는 모래가 한가득이었고 귓속엔 태평양 바닷물이 가득했다. 허탈하게 주저앉아있는데 멀리서 남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대단해!“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럼 당연하지! 물이 무서운데도 다시 도전한 거잖아! 정말 멋졌어! 정말 대단해!”


남편이 웃으니 따라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이 따듯하기도 했고, 인생을 서핑때문에 마쳐야 했던 어린 서퍼도 나에게 같은 말을 했을 것 같아서였다. 서핑도, 가족 여행도 이번이 아니면 다음번에, 그것도 안 되면 그 다음번에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저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위의 에세이는 투룸 매거진 4월호에 연재되었습니다.

https://www.2room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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