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우린 뜨겁던 연애초반을 보내고 있었다. 초여름 해는 저물어 서늘한 공기가 낮은 언덕을 타고 넘어왔다. 그래서인지 대조적으로 남편의 온기가 유난히 더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반걸음 먼저 앞서가던 그는 불쑥 뒤를 돌아보더니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방파제 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 “
놀란 눈으로 남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로맨틱한 속삭임이라기보단 마치 선언과 같았다. 그의 따듯한 손을 지그시 누르며 나는 이렇게 화답했다.
”그럼 나는 너의 등대가 되어줄게. “
일기장 한구석에 단단히 봉인된 채 다른 사람들에게는 쉬이 꺼내지 말아야 할 이런 낯 간지러운 말들을 그때의 우리는 스스럼없이 주고받았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파도로부터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겠다던 남편은 론다의 기차역에 태평하게 누워있다.
“와, 난 독일만 이런 줄 알았는데 유럽에선 기차 연착이 아주 흔한 일인가 보네?”
은근히 비꼬는듯한 내 말투에도 남편은 큰 동요 없이 어깨만 으쓱이고 만다. 사실 기차가 연착되는 것이 남편 잘못이 아님을 잘 알지만, 마치 내일이 아닌 양 맘 편히 손 놓고 있는 모양새가 괜스레 얄미웠다. 나 홀로 조급증에 걸린 사람처럼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데도, 남편은 별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늘 이런 식이다. 식당에서 우리보다 늦게 온 손님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음료조차 못 받아도 불평은커녕 자초지종을 물어볼 생각도 잘 안 하는 남자. 다 사정이 있을 텐데, 괜스레 일하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남편에게 쏘아댈 말을 궁리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세명의 역무원들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남색 유니폼을 입은 역무원들은 ‘그라나다(Granada)’행 승객들을 한데 모았다. 나와 남편을 포함해 서른 명 남짓의 여행객들은 역무원을 따라 반대편 플랫폼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한 플랫폼이나 전광판 어디에도 목적지가 쓰여있지 않았다. 초조해진 나는 우리를 데려다 놓고 다시 훌쩍 떠나려는 역무원의 뒤통수에 한번 더 질문을 던졌다.
“그라나다행 맞는 거죠?”
베레모 아래에 윤기 나는 검은색 곱슬머리 세 가닥을 길게 늘어뜨린 삼십 대 중반의 남자 역무원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고개를 채 돌리지도 않은 상태로 말이다.
“Si! Granada.”
불친절함에 황당하다는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자 그는 다시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다.
“맞다니깐 맞겠지. 그리고 저 사람들도 지금 피곤할 거야. 벌써 저녁 10시잖아.”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파도에 ‘철-썩!‘ 맞은 기분이다. 그새 방파제는 나 대신 파도를 지켜주기로 했나 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어찌 사랑이라고 변하지 않겠는가. 기차에 탄 후 입속에선 어쩐지 쓴맛이 나는 듯했다. 아까그 곱슬머리 승무원이 무표정으로 새로 탑승한 승객들의 표를 검사하는 동안 창가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남편은 그새 팔짱을 낀 채 잠이 들어있었다. 열차 안에 맴도는 쌀쌀한 밤공기에 남편 팔사이로 내 손을 겨우 욱여넣어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그런 내가 불편한 듯 매정하게 창쪽으로 돌려 앉은 남편의 등짝이었다. 그의 로맨틱함은 론다를 떠나자마자 귀신같이 떨어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라나다에 도착하니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택시기사와는 별다른 흥정 없이, 또 남편과는 별다른 대화 없이 조용한 택시는 호텔을 향해 언덕을 올랐다.
론다와 마찬가지로 그라나다 또한 경사진 곳에 세워진 도시였다. 택시는 곡예사가 외줄을 타듯 좁은 오르막 길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올랐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골목 구석구석엔 오렌지색 가로등 아래 여행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호텔은 그라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알람브라 궁전 바로 앞에 있는 4성급 호텔이었다. 깔끔한 호텔 로비만큼 호텔 방안도 정갈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을 둘러보는 나와 달리 남편의 표정은 불만스러워 보였다.
“괜찮아?”
“응 그럼. 그냥 피곤해서 그래.”
사실 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방금 전 호텔 로비에서 받은 영수증을 보고 난 후 남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음을 봤기 때문이다.
“자기야, 이 호텔이 조금 비싸긴 해도 다 이유가 있어. 알함브라에서 가깝기도 하고, 위층엔 수영장도 있다고. 이 더운 날씨에 먼 곳에 숙소를 잡았으면 우린 알함브라를 갈 엄두도 못 냈을걸? 아까 택시 타고 올 때 오르막길 봤잖아”
언짢은 남편 표정에 괜스레 제 발이 저린 나는 속사포처럼 변명의 말을 뱉어냈다.
“누가 뭐라 그랬어? 네가 알아서 잘 결정했겠지. 난 불만 없어.”
남편은 누가 뭐라 했냐는 듯 시치미를 뗀다. 그리고는 욕실로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의 시큰둥한 반응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호텔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조식 뷔페의 모든 음식이 짰고, 직원의 서비스는 엉망이었다. 호텔 야외수영장은 사진보다 훨씬 작았다. 게다가 청소를 언제 했는지 모를 정도로 수영장 밑바닥엔 푸른 녹조가 끼어있었다. 호텔은 알람브라 궁전과는 가까웠지만 그 외 다른 모든 시설과는 멀었기에, 물을 사러 마트에라도 가려면 택시로 올라온 경사진 길을 그대로 따라 내려갔다 와야 했다. 게다가 8월의 스페인 날씨는 강렬했다. 독일의 비 오는 날이 그리워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작열하는 태양에 정오가 되면 사방에서 아지렁이가 피어올랐다. 새들조차 한낮의 열기를 피해기 위해 몸을 숨겼고 영리한 고양이들은 그늘 속 목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정이 넉넉지 않은 여행객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인 알람브라 궁전은 사전예약이 필수였기에 우리는 바깥날씨와는 상관없이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의무처럼 관광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오전부터 남편의 눈치를 살피는데 여념이 없었다. 남편은 유적지에 통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라나다를 목적지에 넣은 것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알람브라 궁전 티켓을 예매한 것도 나였다.
그라나다 도시를 먹여 살리는 관광지답게 알람브라 궁전은 아름다웠고 볼 것도 많았다. 다만 궁전 안 화려하고 정교한 타일 아트와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섞인 이색적인 천장 장식 외에도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이 조급했던 게 문제였다. 구석까지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 중에도 남편은 늘 한걸음 물러나있었고, 가끔은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그를 찾느라 갔던 길을 돌아가기를 반복해야 했다. 미로 같은 궁전을 헤매며 남편을 찾다 지친 나는 결국 남편 찾기를 포기했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궁전 안과 밖을 이어주는 한 정원에서였다. 그는 난간에 기대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 옆에 가서 몸을 기대었지만, 내 몸은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빨리 걸어가 버리는 그에게 짜증이 난 상태이기도 했고, 그의 눈치를 보느라 지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너무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자기야. 이 궁전의 하이라이트는 이곳인 것 같아.”
“그래? 난 네가 지루해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
“아니 전혀? 여태껏 이런 곳은 와본 적 없는 것 같아서 너무 재밌었어. 정신없이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먼저 걸어와버렸더라고. 제인,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런데 알아보고 티켓을 준비할 생각도 못했을 거야. 고마워.”
뜻밖의 말에 놀란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돌아섰다. 마주한 그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숨소리만 들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저번엔 이것을 좋아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종류의 음식은 평소에 입에도 대지 않으니 이것도 안 좋아할 거야. 십 년간 함께했으니 그를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한 오만에서 온 편견들이 온전하게 그를 보는 것을 방해한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는 그라나다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호텔 조식을 먹으며 계란이 짜다고 불평했던 것도,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호텔이 언덕 위에 있는 게 불편하다고 투덜거렸던 것도 나였다. 내가 낡은 수영장 안 녹조를 보며 지불한 숙박비를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을 때에도 남편은 그저 파라솔 아래 앉아 평온하게 블러디 메리를 마시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공원을 걷거나 궁전 입장을 기다리며 서있을 때에도 남편은 늘 어디선가 시원한 음료수를 구해선 돌아왔었다. 그가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뜨거운 태양 때문이었지, 나에 대한 불만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제야 온몸에 힘이 빠지며 그의 몸에 나를 맡길 수 있었다. 그러자 내 몸의 무게를 지지하기 위해 남편의 몸에 부드럽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나의 방파제였다. 그리고 나를 여전히 자신의 등대로 믿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뒤로 그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생각했다. 십 년 전처럼 더 이상 우리 사이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고. 지금처럼 우리 그저 작은 돛단배에 서로 포개어 앉아, 바람이 불어오는 대로 물길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자. 서로를 믿는 한 겁낼 것은 없어. 배를 뒤흔드는 폭풍우보다 위험한 것은 우리 안의 오만과 편견을 불어 일으키는 사이렌(Siren)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