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아니 시작했으면 끝도 있게 해야 한다. " 그것이 유시유종(有始有終)이다."
그래서 선시선종(善始善終)이란 말이 나왔고, 아름다운 죽음을 선종(善終)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시작이 좋으면 끝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시작을 제대로 잘해야 마무리가 좋게 잘 끝날 수 있다는 뜻이 더 가깝다.
논어에는 이와 같은 뜻으로 유시유졸(有始有卒)이란 표현이 있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은 유시무종(有始無終)이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작에 이어지는 과정이 반듯해야 한다.
시작은 잘해놓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과정을 망쳐버리면 끝은 보나 마나다. 좋은 결과와 마무리는 초발심(初發心)을 유지하는 자세와 과정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따라 결정된다.
특히 인간관계에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럽고도 추악한 기억과 순수하고 웃음 지을 수 있게 하는 추억 등의 모든 요소가 결합된다. 친구든 연인이든 대화를 나눈 '이'라면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 또는 좋지 않은 기억들이 있곤 하다.
보통 인간은 "굳이 말해야 되나? "라는 진실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관계 유지라는 핑계에 지배 당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이른 '기레기'>라는 필자는 굳이 말해도 되지 않을 진실들을 타인에게 말함으로써 상당히 많은 상처를 주었다. 이른바 '젊은 꼰대'라는 지적이다.
앞서 말한 '유시유종'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2015년 1월 25일부터 시작된 기자질의 여정은 나에게 많은 인간관계를 선사해주었다. 10대 시절 '양아치'와 같은 삶을 살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고 좋지 않은 행동들을 일삼으며 20대 초반까지의 난 '진정한 人'이라는 개념을 깨닫지 못했다.
기자질을 통한 인간관계는 대부분 가벼운 '유시유종'이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기자이기 이전의 한 사람으로 봐주는 유시로 나와 유종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1000여 명 중 1명은 있었다. 후배 또는 선배라 불리는 이들은 나를 붙잡아주는 밧줄이며 썩어 비틀거릴 때 받쳐주는 지팡이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플랜과 목적에는 유시유종해야 하나 인간관계에서의 유시유종은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 객관적 판단에 따라 유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감사한 경험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의 겉모습을 보고 관계를 이어간다. '얘는 나에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래도 되겠지'라는 착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솔직한 칼날은 타인에게 트라우마를 남기게 하고 상처의 미궁으로 빠지게 한다.
필자도 이처럼 자신의 기준을 만들어 "넌 이런 것 같아"가 아닌 "넌 이러니까 이래야 해"라는 강요식의 충고 아닌 비판을 가하며 수백여 명과 유종한 듯하다.
한 동생이 그러더라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 선배 입장에서 그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 아닐지 몰라도 그 사람은 선배가 소중할 수도 있다"라고 말이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모른다. 그렇게 수많은 유종을 경험하고도 기대하지 않으며 나만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가장 편하다. 관계보단 일이 먼저인지라 울타리 외 타인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은 힘들고 벅차다.
허면 외인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을까? 아니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부분 더러운 기억들 밖에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