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브런치를 쓴다. 그동안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해까지 비관적이고 부정적이었다면 이젠 조금이라도 웃으려 애쓰고 미소라는 가면이라도 쓸 줄 아는 날 다시 찾고 싶었다.
지난 3년간 내 주변인들은 내가 기자로서든 인간으로서든 살아가는 과정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상당히 많은 피로감을 느꼈다. 실제로 몇몇의 인연들이 떠나가기도 했다. 응원만 하던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내 본모습을 모르기에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줬지만 지근거리에 있는 일부는 "때론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거나 "공감이 아닌 동화가 된다"며 어색함과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 버렸다. 건강하지 못했던 내가 그들에게 아픔과 일상의 걸림돌 또는 모난돌이었던 것 같다. 반대로 애초 그렇게 생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몇 달 전이었던가? 후배를 포함한 가장 가까운 이들이 물었다. "과거가 그립지 않냐? 그땐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솔직히 말해 그렇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지 않았고 아이템과 사건이 끊이질 않았으며 무언가를 취재할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행복이 아니었다. 일상의 활력일 뿐. 잠깐 활짝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술과 같은 것이었다. 요즘 2~3년 전 같이 활동했던 이들과 연락해보면 서로가 말한다. "그땐 진짜 재밌었는데."라고...
뭐가 그리 재밌었을까? 또래들과 비교해보면 화려하면서도 참 다이나믹한 20대 중반이라는 청춘을 보냈다. 재벌과 정치권 연예계 마약사건과 성범죄. 이른바 짜릿한 야마를 쥐고 굵직한 단독 보도를 하면서 나라는 사람도 가벼워졌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인터뷰했던 제보자와 피해자 여럿이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내 정신조차 망가졌다. "나 때문에 죽었다"라는 죄책감으로 인해 모든 것들을 극단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날 밝은 것과 차단시켰다.
그럴 때마다 내 이야기를 가장 많이 공감해줬던 분이 계신다. 경희대 백종우 교수님이다. 그는 24년째 의사 생활을 하면서 돌봤던 환자 중 11명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특히 가장 친한 동료이자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전문의였던 고 임세원 교수가 진료 도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임 교수 사건 후 조현병 환자를 진료하기 두려웠다. 저를 가장 위로했던 사람은 환자분들이었다.” 처음 안 사실이다. 교수님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는 줄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만 들어주셨기 때문에. 환자와 의사의 관계였기에 그러셨던 걸까?
사람 대 사람이 대화하는 과정에서 보통 공감의 첫 단계는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에서 시작되는데 교수님은 그러시지 않았다. 의사의 의무에만 충실하셨던 것 같다. 오히려 나에게 ‘프라이빗 워’라는 영화를 보라 하셨다. 본인이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이자 나의 극단적 삶과 닮은꼴이라고 하셨다.
보통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는 주변인에게 암적인 존재라고 한다. 한없이 초라한 구석에 내몰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게 행복하다고 착각한다. 그 삶이 본인을 심연으로 끌어들여 피폐해져 가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심각할 경우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정체감 장애까지 온다. 순간순간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고 자신이 내린 결정과 판단에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러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이 아팠을 나 자신을 안아주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이젠 웃으며 살아도 된다고.
2주 전에는 오랜만에 내가 가장 존경하면서도 아끼는 형과 mbc 선배를 만났다. 클럽 버닝썬과 아레나를 수개월간 같이 취재하던 두 사람은 나에게 정말 깊고도 날카로운 충고와 조언을 해줬다. "온전한 네 것을 만들어라. 욕심부리지 마라."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젠 가벼운 과거를 회상하되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앞서 말한 2~3년 전 같이 활동하던 이들에게도 요즘 말한다. 가볍지 않게 무겁고 진중한 것들을 짊어지고 가벼운 주제라 할지언정 가장 암울하고 무거운 게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고. 이젠 재밌는 걸 찾을 때가 아니라고.
그래서 내가 취재하던 것들 중 가장 암울하고 어두웠던 것들부터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다. 영화 <공기살인>을 보고 다시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교수님께서는 차근차근 너무 아팠던 것들부터 시작해서는 아니 된다고 해주셨다. 그래서 남들이 했으나 자세하게 다루지 못한 것들부터 찾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습기살균제 참사 기획 형태의 기사는 하나가 나갔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가습기살균제진상규명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으셨던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님부터 뵀다. 기사가 나가고 피해자 세분께 연락이 왔다.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오랜만에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행복해서 울었다.
교수님께 말씀드렸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과 면담을 한지도 2년이 되어가는데 가장 행복했던 것을 찾으라 하셨잖아요. 제가 행복이라는 걸 느끼는 건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제는 감정적으로 조절할 줄 알게 됐습니다. 동화가 아닌 공감하기.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운 일이겠지요. 교수님 덕에 제 자신을 더욱 알아가고 있습니다."
난 <일요시사>라는 주간지로 이직했다.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고 내가 가장 존경하고 믿는 형이 몸담았던 곳이기도 하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지도 넉 달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가벼웠고 진중하지 못했다. 제대로 무언가를 잡고 싶다는 욕망은 최근 욕을 먹으면서 버리기 시작했다. 가장 의미 있는 것과 소중한 것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하기로 했다.
과거 내 브런치가 암울함과 다크함으로 마무리가 됐다면 이젠 좀 반대로 하기로 했다. 별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 글 보고 희망을 가지는 분들이 계시겠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