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건강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쁘게 말하면 반복되고 무의미한 일상의 연속 좋게 말하면 혼란스럽지만 평온한 것 같은 시간이 지속되고 있다. 그 누구도 돕지 않고 있기에 난 버러지라는 극단적 자책과 망상은 버린 지 오래지만 내 삶의 행복은 그 망상 속에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자책이 곧 나였다. 그런 내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면서 10·29 이태원 참사에 공감하는 능력도 사라졌다. 웃지 못하고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이 무감각함이 과연 내가 나아졌는가? 건강해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부터 극단적 상황을 수없이 봐와서 그런지 일정 이상의 고통이 아니면 타인이 힘들어 보인다고 해도 공감이 되질 않는다. 오히려 아! 지금은 공감할 때이구나라고 판단해야 공감되기 시작한다.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다. 생각하고 이해해야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적어도 자책을 했을 때는 그 이후에 자연스레 행복이라는 감정이 들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항상 행복한 일상을 살아갈 순 없다. 그러나 행복이 아닌 의미를 둔다면 얘기가 다르다. 나는 과연 현재 어떤 의미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말했던 하루의 의미가 아닌 의미의 하루를 제대로 실행하고 있을까?
그러질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다시 한번 위기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기로 했다. 일종의 실험이다. 감정적으로 버티질 못할 때만 약을 먹고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서울시청 광장에 위치한 10·29 이태원 참사 분향소를 찾는다. 유가족 분들을 뵙고 알고 지냈던 두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오늘은 잘 지냈냐고 묻는다. 잠시지만 그렇게 해야 내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무의미해지고 싶지 않아 무언가라도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의미 있는 한 아이템을 찾았다. 보도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아직 유가족분들과의 논의가 끝나지 않아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면 쓰지 않을 것이다. <단독>이라는 명목으로 내 이름값을 올리거나 좋은 보도라는 탈을 쓴 채 그들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쓰레기짓만큼은 하고 싶지 않다.
현실적으로 참사와 관련해 지속적으로 보도를 할 순 없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취재하면서 유가족분들과 소통하는 건 가능하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치료를 받으며 나아졌던 과정이 회귀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는 많이 무감각해져서 고통에 공감하는 바닥이 더 내려가서 이 결과가 나를 더 좀 먹게 하는 것인지 아직은 도전해보지 않아 잘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 잘 버텨왔고 그 끝이 내 인생의 마침표가 된 적은 없기에 자신은 있다.
어쩌면 내 행복은 극단적 상황이라는 위기와 피폐함에 빠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아닌 내가 유일하게 자연스레 느낄 수 있는 감정이 그것밖에 없어서 중독된 것일 수도 있다. 이른바 감정의 모순에 따른 괴물이 됐을 수도 있다. 그게 위험한 걸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소함이 행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만 하면 된다. 그런 인생도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현재 다가오는 것들 중 내가 선택한 행복은 위와 같다. 문제는 이 같은 극단적 문제가 7년간 반복돼 왔다는 거다. 익숙해졌기에 나쁘지 않겠지? 괜찮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