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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버들 Aug 08. 2023

주전자 안에서 보리차는 끓고

                

얼마 되지 않아 온 거실에 보리 향이 흘러넘쳤다.

정말 오랜만에 끓여본다. 티백 보리차와 전혀 다른 냄새다. 지금에야 보편적으로 생수를 사다 먹거나 집에 장치된 정수기로 물을 내려 먹는다. 그로 인해 나 또한 점점 끓여 먹지 않게 되었고 끓여 먹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며칠 전 함양에 사는 동시 시인이 직접 재배한 흑보리를 볶아 보내주셨다. 오랜만에 주전자를 꺼내 볶은 보리를 넣고 끓여본다. 보리차 냄새.



이른 아침이면 분리된 부엌에서 보리차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노란 주전자 주둥이에서 증기가 솟아오르고 그 수분이 부엌을 메울 때쯤, 엄마는 씻어둔 델몬트 1.5ℓ 유리병을 준비해 두었다. 보리차나 옥수수차를 끓여 담기엔 딱 적당한 병이 바로 델몬트 병이었다. 따뜻한 보리차를 넣어도 깨지지 않고 손잡이가 있어 미끄러지지 않아 사용하기 좋았다. 엄마는 식힌 보리차를 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더운 여름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냉장고에 있는 델몬트 유리병을 꺼내 물을 마셨다. 청량음료보다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1980년대 그때 만에도 물은 집에서 끓여 먹는 것이었다. 사 먹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생수를 판매하지도 않았을 때였다. 공식적으로 생수 판매는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4년이라고 한다. 그때는 ‘누가 물을 사 먹어’ 그랬는데 지금은 당연하게 물을 사 먹는 시대가 되었다. 보리차를 끓이며 편리함에 너무 빨리 길드여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끓인 보리차를 200ml 델몬트 유리병에 담는다. 얼마 전에 마트에 가니 과거의 델몬트 주스가 진열되어 있었다.  크기만 작아졌을 뿐 그대로의 모습이 신기하고 귀여웠다.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사 왔다.  과거에 가정에서 보리차, 옥수수차, 식혜 등을 넣어 보관하느라 병이 회수되지 않아 없어졌다는 델몬트 주스 유리병. 레트로 붐을 타고 다시 컴백했다. 그때의 그 감정을 느끼고 싶어 사 온 유리병에 보리차를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하나씩 꺼내 먹으니 좋다. 재료와 용기의 차이는 미묘한 맛의 차이도 나지만 무엇보다 사람의 냄새로 이어지는 것 같다. 엄마의 냄새로.  과거의 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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