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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말이 Mar 25. 2020

소심함의 양면성

소심함에 관한 이야기

 소심함은 자신감이 부족해서 생긴다.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살아왔다. 소심한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한다. 사람들 앞에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지는 상관이 없다. 어떤 상황이든, 무슨 주제이든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가 없다.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겁쟁이 같은 나의 모습들은 자신감이 없어서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부족함을 채우는데 노력을 쏟아 왔다. 그래서 무엇이든 힘에 부쳤다. 즐기지 못했고 결국은 포기하게 됐다. 그러니 어떤 것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기란 힘들었고 그래서 또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다. 악순환의 반복이었고 그렇게 날이 갈수록 소심함은 굳건해졌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돌아본 나의 모습은 거만하다. 교만하다. 소심해서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함을 잃은 자만의 응집체이다. 가족, 친구, 주변의 여러 관계들과 지내온 시간이 길어지고 가까워질수록 그 속에서 조금씩 소심함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관찰한 나란 사람은 그랬다. 거만했다. 어느덧 나는 한마디도 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어디에서도 나의 잘못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변한 것인지, 나의 천성적인 거만함이 소심함에 가려져있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거만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아직 낯선 사람과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소심함을 가져있기에 그렇지 못하지만, 확실하게 가까운, 소심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확실히 거만하고 교만하다.    

 

 나는 정신적인 성장이 느렸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원하는 중학교를 적어 오라며 건넨 종이에 적을 수 있는 중학교의 이름이 같은 동네에 있던 학교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중학교를 모르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중학생일 때는 사춘기를 겪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겪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수학과 과학을 지지리도 못하면서 이과를 선택했다. 그렇게 꼭 이과를 선택해서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대학교 신입생일 때는 미팅에 나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모조리 거절했다. 그때까지도 운명적인 만남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어왔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 공무원을 준비한다는 친구에게 “공부 잘하는 네가 왜?”라고 물었다. 그렇게 나는 그런 면에서 늘 부족했다. 세상 물정도 잘 몰랐고, 인생도 사회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공부를 그리 못하는 편도 아니었고, 누구에게 모자라단 소리를 들은 적도 많지 않았지만 그런 면에서는 퍽이나 모자랐다. 그렇게 자라오면서 나는 묻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고, 잘못은 언제나 나의 쪽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변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그때부터 거만함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명확한 건 나는 지금 거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눈치 보며 나를 돌아보며 살았건만 어느새 커져버린 자만심을 알아채지 못했다. 변한 것이든 원래 나의 모습이든 확실한 것은 소심함이 자만심을 키워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커버린 자만심이 거만한 성격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앞에 나서지 않으며 나는 속으로 으레 생각해왔다.     


 ‘내가 너보다 잘 알아’, ‘내가 저 사람보다는 잘할 것 같은데?’, ‘별거 아닌 거 같은데?’ 


 그러면서도 소심해서 나서지 못한다는 핑계로 어느 곳에서도 나서서 무언가를 해보진 않았다. 그러면서 실패가 줄어들고, 부족함을 느낄 기회가 줄어들었다. 내가 성장해서가 아니라 단지 소심함에 나서지 않아서 그럴 수 있었다. 나설 만큼 낯짝이 두껍지 못하고, 주목받기 싫을 뿐이라는 생각들로 현실을 외면하고 나만의 세상 속에서 나란 존재를 만능의 존재로 키워나갔다. 그런 환상은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 내 안의 세상에서만 존재하고 활동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괴이한 환상을 품고 있다 보니 소심함을 벗게 되는 편한 자리에서는 거만함이 스스럼없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자기만 잘난 사람만큼 재수 없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거만함에 크게 뜨끔했다. 하지만 쉽게 고칠 길은 없고 이미 익숙한 거만함은 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소심함에 묻기 시작했다. 소심함의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안도감인지 안타까움인지 확인해야 했다. 소심함의 뒤에 안도감이 찾아온다면 자신감이 부족한 것이다. 부족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기에 긴장이 풀리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감의 부족은 자신감이 없다고 믿고 지내왔기에 배워왔던 자신감을 찾는 방법으로 해결하면 된다. 하지만 안타까움이 찾아오는 것은 자만심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데 소심함 때문에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하기에 안타까운 것이다. 정말 자신감이 있다면 소심함을 딛고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성장해왔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끝내 나서지 못하고도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실력을 고평가 한 자만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안타까움은 거짓이며 자만심이다.    

 

 소심함에 나를 표현하지 못해서, 나서지 못해서 나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자만심에 실제의 나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길 원해왔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에 늘 불만족스러웠고 소심함이 싫어졌었다. 그것은 소심함의 뒤에서 나 몰래 조용히 자라나던 자만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자만을 알아챘고, 거만함의 안식처를 찾아냈다. 이제 또다시 새로운 노력을 시작할 때다. 나의 소심함을 밉게 만들었던 자만심을 청소해야 한다. 거만함은 자만심을 먹고 자라고 자만심은 소심함의 양면성에 기대어 산다. 소심함의 구석구석을 늘 세심히 살펴야 할 이유다. 그러다 보면 ‘내가 잘 아는데...’, ‘내가 잘할 수 있는데,,,’ 같은 말들이 줄어갈 테다. 물론 소심함이 없어지지 않는 한 자만심은 소심함의 그림자에 숨어 끊임없이 틈을 노릴게 분명하다. 밀어낸 자만심이 다시 돋아날 틈 없이 많은 꽃이 필 무렵까지 나와 소심함을 돌아보는 것에 망설임이 없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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