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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Oct 28. 2023

남편이 개인사업을 한다는 건

(feat.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독립을 해본 적이 없다.)

남편 사업은 시작하고 몇 달 후부터 계속 잘 성장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원하는 걸 다 하며 결혼식을 하고 원하는 것들을 대부분 즐기면서 여유롭게 신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수입이 줄더니 요즘은 좀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 다들 어렵다, 어렵다 하는 시기니까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는 직장인 아니고서야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겠지만.



지난주 운동을 하며 PT샘이 요즘 남편 사업 괜찮냐고 묻길래, 전 같지는 않다고 간단히 답했다. 선생님은 자신도 자영업자라 너무 이해된다고 하시며 정말 갑자기 내 어린 시절을 사로잡았던 추억의 게임 이름을 소환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당대 너무나도 유명했던 게임 '프린세스메이커 2'였다.

예상했던 건 "공주로 키우려 했는데 마음처럼 크지 않더라고요." 내지는 "무사수행 진짜 재밌었죠?" 같은 밝고 가벼운 이야기였지만, 이어진 건 그땐 잘 몰랐으나 그 게임은 정말이지 현실을 아주 잘 반영한 극사실주의 게임이었더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였다.


"처음 설정할 때 아버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잖아요. '상인'을 선택하면 매년 수입이 들쑥날쑥했던 거 기억나요? 어떤 해는 엄청 많고, 어떤 해는 엄청 적고."


"어릴 땐 그게 왜 그런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제가 자영업을 하고 보니 이젠 완벽히 이해가 되더라고요."


아. 세월이 지나도 명작은 역시 클라스가 다르구나! (애써 웃어본다.)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아지는 시기가 도래하자 숨어있던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드라마 속의 사업하다 쫄딱 망한 집처럼 우리 집에도 빨간 딱지가 덕지덕지 붙는다던가, 망한 집의 주인공처럼 나도 정말 배가 고픈데 국밥 한 그릇을 사 먹을 돈이 없어 국밥집 창문 너머로 남이 먹는 모습만 하염없이 쳐다본다던가 하는 등의 최악의 상상만 떠올랐다.


어? 근데 이상하다? 나 원래 돈에 이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닌데. 그냥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분수에 맞게 생활하자는 주읜데. 그런데 지금은 왜?


평소 돈에 대해서 예민하지 않은 내가 이번에는 왜 이리 유난스러운지에 대해 고민해 봤다. 그랬더니 범인은 '대출금을 포함한 고정비'였다. 나는 작년에 결혼을 하며 어엿한 독립 가정을 이루었고 생애 처음 내 소유의 집이라는 것도 (대출금과 함께) 생겼던 것이다.



예전에 부모님 집에 살며 연애할 때는 수입이 줄어도 심지어 없어도 스트레스가 없었다. 고정비라고 해봤자 같이 사는 부모님께 명목상 드리는 생활비가 전부였고, 부모님이 당장 돈이 급하신 분들은 아니라 여차하면 몇 달 미룰 수도 있고 까짓 거 건너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직장에서 돈을 벌며 내가 단순히 힘들어하는 정도를 벗어나 성격이 달라지는 모습도 보이니(아마도 경조나 우울 시기의 모습이었겠지. 직장에서 꾹꾹 참다 집에 와서는 그만큼 조절이 잘 안 되었을 테고), 어느 날 엄마는 사치나 돈을 이상한 데 쓰는 그런 것만 안 한다면 나 하나 정도는 보살펴줄 수 있으니 돈 버는 거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해줬다. 그 말은 나에게 큰 위로와 응원이 됐고, 이후 믿는 구석(=부모님)이 생겨 돈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만큼만 편안한 마음으로 일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서는 경제적 부분을 남편에게 의지했다. 남편이 그러라 하기도 했고 나도 그러는 편이 마음 편했다.


(나는 나를 보호해 줄 울타리가 있어야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인간이라는 걸 스스로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자발적 독립에 대한 마음은 접은 지 오래됐다. '어차피 언젠간 강제적으로 독립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굳이 자발적으로 해야 할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치게 싫은 그런 상황에 대한 생각은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는데,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세상에 혼자 남을 자신이 정말로 정말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전을 위해 모의 훈련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므로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 가서 맞닥뜨려볼 참이다.)


그런데 내가 의지하는 남편이 경제적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내가 어찌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에 예민해지는 게 당연하다. 이게 맞고 이게 정상이다.






다만 앞서 서술한 최악의 상상은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던 우울기의 정점일 때 한 것이라 너무 극단적으로 흘렀다. 상태가 조금 호전되고 보니 우리의 고정비는 둘 중 하나가 몸져눕지 않는 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다.


희망은 더 있다. 얼마 전 진료 때 새로 항우울제를 추가했는데 기존에 먹었던 그 어떤 약보다 효과가 드라마틱하게 나타나고 있다. 좋은 징조다. 내가 지금보다 일을 늘릴 수 있게 되어 가계 수입이 늘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전환도 있었다. 나는 마지막 퇴사 후 2년이 되어가는 얼마 전까지 내가 전에 하던 일에 대해 '나는 왜 이 일 밖에 못 할까?'라며 배부른 볼멘소리를 했었다. 지금은 내 능력과 경력은 충분히 희소성이 있고, 나만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



내 병도, 돈도, 지금을 기억하며.

딱 기다려, 경제적 자유!

(& 남편 파이팅!)


+) 남편에게-

나 얼마 전 브런치 공모전에 참여했어.

내가 만약 김은희 작가님처럼 성공한다면 와.카.남이 되어 편안하게 살게 해 줄게! ㅋㅋㅋㅋㅋㅋㅋ

(& 어쨌든 남편 파이팅!)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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