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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Dec 31. 2023

애착형이 변한 이유

나는 지금이 가장 따뜻해.

그동안 누구를 만나도 도저히 채워지지 않았던 그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겠는 그것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는 동안 늘 힘들었는데, 스스로에게는 답답함이 들고 상대에게는 미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랬던 이유가 오늘(2023년 12월 28일), 곳곳의 순간들이 모여서 신기할 정도로 매끄럽게 정리가 됐다.






시작은 외출 전 남편과 했던 애착에 대한 얘기였던 것 같다. 나는 분명 불안 애착형에 속하는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한 안정 애착형인 듯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는 남편의 애정이 내가 만족할 정도로 충분해서라는 말도 덧붙여서.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면서 애착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애착 대상(정확하게는 애착 대상이라고 여겨야 했던 대상이 대부분이지만)에 대해 늘 불안정한 애착을 형성해 왔다. 상대의 관심이나 애정의 중심이 조금이라도 나에게서 벗어나는 것 같거나 상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한 것 같은 낌새가 느껴지면 불안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여 상대방에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차라리 드러내야 했을까?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해야 될지는 알 수 없어서 내가 택한 방법이 고작 이거였으니. 그냥 혼자 서서히 멀어지다가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관계를 완전히 끝장내는 방식으로 힘듦을 회피하는 것.


일을 마치고 버스를 타서 눈을 감으니 이어폰으로 들리는 노래에 몰입이 됐다. 성시경의 노래모음 플레이리스트였다. 흘러나오는 어떤 곡을 듣다가 갑자기 다른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는데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게 니 사랑과 행복 중 하나만 고르라면 택하라면 한치 망설임도 없이 언제나 난 니 행복이고 싶어.'였다.

사랑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내가 어릴 때부터 추구한 사랑의 모습은 그런 거였지.' 하는 생각과 과거에 그와 비슷한 애정을 받는 느낌에 따뜻했던 시절이 있었지.'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10대 초중반에 걸쳐 친구 관계에 속하지만 그 범주로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지금 말로 하면 친구와 남사친 사이 그 어디인 듯한) 이성친구가 한 명 있었다. 누가 봐도 눈에 보일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많았고 내가 재밌어할 만한 것들(가령 최신노래, 만화책, 유머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가져와서 말을 걸었다. 처음엔 관심이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덕분에 한 번씩 웃었고 늘 초긴장 상태로 사느라 항상 추웠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따뜻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 꾸준함과 섬세함이 소중하다 느껴졌고 그리워졌다. 아마 자신의 행복에 더해 나의 행복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행동해 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더 한참 시간이 지나고 또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연인 관계에서 그 정도의 꾸준함과 섬세함이 기준점이 되어 있었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에 미치지 못하면 만족이 안 되고 허전하다 느꼈다. 마치 "그 따뜻함을 알아버려서 지금 나는 더 추워."라는 드라마 속 대사처럼.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게 기준이 되다니, 참 이상도 하다. 근데... 연인이라고 칭해지는 관계라면 적어도 그런 친구보다는 더 나은 마음이어야 하는 것도 맞지 않을까?


사랑에 대한 생각은 애착에 대한 생각을 다시 불러왔다. 나의 애착이 안정된 이유. 내가 느끼는 남편의 사랑과 애정의 정도가 앞서 말한 기준점을 훌쩍 넘어 충분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 그렇다면 그건 왜?

함께하는 동안 남편은 한 번도 나를 헷갈리게 한 적이 없고, 불안하게 한 적이 없다. 이건 처음부터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는 말은 아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애정의 정도가 투명하게 보여서 마음이 편했다는 뜻이다. 비유를 하자면, 우영우가 김밥을 좋아하는 이유 정도가 될 것 같다. 들어간 재료가 모두 보여서 믿을 수 있다는.

나도 남편도 처음에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아주 크지는 않았다. 당연하지 않나? 상대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얼마나 겪었다고 마음이 그렇게 크겠는가. 내 생각엔 초기 연애 단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 같지만 대개는 그걸 상대에게 철저히 숨기는(숨겨야 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자신의 사랑을 과시하는 것이 연애에서의 규칙이자 예의인 것처럼. 또 혹시라도 들키면 상황이 안 좋아지고. 나는 그게 늘 힘들었다. 내가 판단하기에 분명 그 정도 마음은 아닌 것 같은데 과장된 행동을 받고 표현을 듣는 게 불편했고, 그런 걸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도 요구하는 건 더 불편했다. 나는 아직 서로 간의 애정에 만족이 안 되는데.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 내가 견디기 힘든 인지부조화. - 그건 끊임없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와 남편은 처음부터 그때의 마음 정도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또 그에 대해 서운해하지 않고 수용했다. 그저 최선의 노력을 하며 상대방을 만났고 감정이 자라나는 속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대했다. 감정과 마음을 속이지 않아도 돼서 편안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우리는 결이 맞는 사람이었던지 함께 하면서 점점 더 좋아졌고 마음이 서서히 계속 커졌다. 그렇게 변하는 감정과 마음에 대한 이야기 역시 허물없이 나눴고, 늘 솔직했기에 그 말들을 믿을 수 있었다. 어느새 돌아보니 기준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덕분에 너무 따뜻하다. 다음 추위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넘치도록 충분하다고 느껴지는 사랑을 받고, 나 또한 그런 사랑을 주고 싶은 사람을 만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안다. 우리의 미래가 어쩌면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이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기에 나는 감사함을 놓지 않고 앞으로도 나의 사랑에 온 마음을 다할 것이다.



올 가을 추억 데이트. 여기에서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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