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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Sep 04. 2023

슬로어답터의 꿈

전동칫솔과 생리팬티

남편은 얼리어답터다.


새로운 기술의 빠른 사용을 즐기고, 새로운 기기에 대한 열망도 늘 가득하다. 만약 사고 싶은 걸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우리의 공간 안에는 슈퍼카나 명품시계 같이 대부분의 남성들이 선망하는 물건보다 각종 전자기기가 더 무한대로 증식할 것 같은 합리적 의심이 든다.

 여기까지는 다. 하지만 다음의 지점부터 나는 남편에게 '읭?' 하며 특이점을 느꼈다. 남편은 새로운 것들을 접할 때 사용설명서를 안 보고 일단 사용하는데, 대체로 직접 사용해 가며 사용법을 익힌다. 이는 조립제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지트에서 각종 조립 가구들을 사들이며 남편에게 조립을 부탁했을 때, 조립설명서는 보지도 않고 (완성품 사진과 부속품들의 모습만 대충 훑은 뒤) 일단 먼저 냅다 조립을 시작하는 모습에 처음엔 적잖이 당황하며 불안했었다.

만약 얼리어답터에도 MBTI 같은 유형이 있다면 남편은 기기를 분해해서 기능이나 기술의 작동원리에 대해 분석하고 싶은 마음으로 얼리어답터가 된 쪽에 속할 것이고, 이는 아마도 호기심과 탐구심이 풍부한 남편의 성향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반면, 나는 슬로어답터다.


무언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써보니까 그거 정말 괜찮더라.'라고 말할 때 나는 비로소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움직임을 보인다. 무엇이든 검증된 것을 편하게 느끼고, 정보를 충분히 찾아볼 수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꽁무니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무척 바쁘다. (배달앱이나 토스 같은 금융앱도 남들이 이미 다 사용하고 있을 때 남편을 만나면서 처음 사용해 봤다.)

그렇다면, 나의 슬로어답터 성향은 타고난 것일까? 네버, 절대 아니라고 본다. 나는 무언가 사야 하면 상품에 대한 상세 페이지를 세상 열심히 읽고, 먼저 경험해 본 사용자들의 차고 넘치는 리뷰(찐후기)들을 다각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조립 전에는 조립설명서, 사용 전에는 사용설명서 정독도 필수다. 하지만 나는 과정이 대체로 즐겁지 않고, 귀찮지만 해야 하는 의무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냥 대충 하면 되지 않냐고? 나도 그러고 싶다. 정말 대~충 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돼서 느새 보면 강박적으로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근데 대충이 안 되면 가용할 수 있는 에너지라도 좀 많던가! 뭔가가 하나 필요해서 이거 저거 알아보고 사용법 숙지하고 사용하는 단계까지 오면 체력이 방전되어 아주 너덜너덜해진다.

이런 연유로 나는 살아오면서 강제적으로 미니멀리스트와 아날로그 감성자, 그리고 슬로어답터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새로운 문물을 접해야 하는 상황은 나에겐 정말로 무척 신경이 쓰이고 번잡스러운 상황인데, 몇 달 전 신문물을 동시다발적으로 접하게 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며 굉장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그리고 그때의 이야기(라 쓰고 울분이라 읽기)를 왠지 모르게 글로 남기고 싶어 대충 소재만 적어놨었다가 이제야 차분하게 꺼내어 본다.


신문물 1. 생리물품: 내 필요에 의해 구입. '정보수집-구매-사용' 과정을 거침


언젠가부터(사실은 한참 전부터) 여자들만 걸릴 수 있는 마법에 걸릴 때면 불편감과 불쾌감, 그리고 찝찝함을 심하게 느껴 왔다. 그래서 여자들만의 수다 시간에 가끔 이에 대해 얘기했는데 그러면 각종 장점들을 말해주며 누구는 생리컵, 누구는 면생리대, 누구는 생리팬티를 권하곤 했다. 하지만 '바꿔볼까?'라는 고민은 들을 때 잠깐 뿐이고 며칠을 참으면 또 큰 문제없이 일상생활로 돌아오니까 그냥 쭉 하던 대로 지내왔었다.

결국 문제가 생겼다. 연초부터 마법의 기간을 겪을 때마다 피부발진과 가려움이 조금씩 심해진 것이다. 사람은 목이 말라야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그제야 나는 그동안 들은 지인들의 조언을 반추해 가며 적극적으로 일반 생리대의 다른 대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늘 그랬던 대로 상품의 종류, 브랜드, 상세 설명 및 리뷰, 제품별 비교 리뷰 등 엄청난 정보를 끌어 모은 뒤 꼼꼼히 살펴보며 고민했다. 제품의 수는 적었지만 사이즈, 착용감, 사용방법, 세탁방법 등 디테일하게 살펴볼 사항은 무척 많았다. 지나고 보니 가격이 꽤 고가라 더 신중하게 비교했던 것도 같다. 사용해 보기도 전에 이미 지치는 느낌이었지만, 그렇게 힘들면서도 대충 할 수가 없어 최종선택까지 참 열심이었다. 그 결과 지금은 모 브랜드의 생리팬티에 정착해 아주 만족 중이긴 하다.


신문물 2. 전동칫솔: 남편의 제안에 의해 구입. '사용' 과정만 거침


전동칫솔은 남편이 자기 걸 사면서 나한테도 써보겠냐고 물었고 내가 그러겠다고 답하며 제품 선택의 고뇌 과정을 건너뛰고 접하게 된 물건이다.

어느 날 택배가 왔고 남편에게 대충 사용법에 대해 듣고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화장실로 가서 바로 작동시켜 봤다. 설명이 너무 대충이었던 걸까, 내가 너무 대충 사용했던 걸까? 치약과 물이 사방에 튀었고, 칫솔머리와 이가 자주 부딪히며 나는 딱딱거리는 소음이 불쾌했다.

나오자마자 검색창을 켜고 전동칫솔 사용법을 찾아봤다. 다음번 사용부터는 바로 평화를 찾았다. 역시나 나에겐 자세한 사용설명서(+ 실사용자들의 사용팁)가 필요하다.






두 가지 루트로 신문물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걸 접하는 상황에서의 남편과 나의 차이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통찰도 얻게 되었다.


1. 나는 나에게 100% 정말 필요한 물건에 대해서만 신경 쓰도록 하자.

2. 그 외의 신기술 선별과 설치는 남편에게 맡기고, 나는 필요한 경우 사용설명서만 읽도록 하자.

(남편은 전반적인 작동 원리는 이해하지만 세세한 사용법은 모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만 사용설명서를 정독하는 내가 나서면 될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악동뮤지션의 <후라이의 꿈>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도 깊은 감명과 함께 통찰을 얻었다. '난 차라리 꽉 눌러붙을래 날 재촉한다면 따뜻한 밥 위에 누워 자는 계란 fry fry 같이 나른하게' 중 '따뜻한 밥 위에 누워 자는' 부분에서 울림이 왔다. 따뜻한 밥 위에서라면 계란 후라이가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고민 없이 누워 잘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이미 내 인생의 전반에서 따뜻한 밥 같은 존재라 나는 남편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하다.

그래도 괜히 오늘 글의 주제에도 맞춰 한 번 대입해 보자면, '얼리어답터인 남편 옆이라면 슬로어답터인 나도 뒤처질 것에 대한 불안 없이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가 될 것 같다.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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