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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Feb 24. 2024

어느 보통날, 원하던 일이 우연히 나에게 왔다

(+ 두렵지만 맞서볼 것이다)

얼마 전 채용공고의 따뜻한 워딩에 끌려 망설이다가 지원을 했고, 일사천리로 면접을 잡았지만, 면접을 보러 가는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왜냐면, 나는 아직 임상에서 다시 일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2021년 12월에 직장을 퇴사하고, 다음 해 7월에 하나 있던 홈티를 그만두면서 임상을 떠났다. 2-3년 간 긴 슬럼프를 겪다가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일을 완전히 놔버린 것이다. 아니, 번아웃과 우울증이 점점 심해져 놔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생계의 위협이 온다 해도 다시는 임상으로 갈 마음이 없었고, 급여 조건이 나빠지더라도 차라리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거들떠보기가 싫었고, 실은 계속 나아가기가 두렵고 자신이 없었다.


정확한 원인을 하나로 콕 집기는 어렵다. 10년 이상 거의 공백 없이 일하며 서서히 쌓이고 있던 상처의 크기가 일하면서 느낀 보람의 크기를 넘어섰다. 또, 경력이 쌓이며 대우가 좋아졌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기대치 역시 높아졌다. 스스로도 성과에 대해 강박적이라 느껴질 만큼 욕심을 냈다. 부담이 압박이 됐고, 쉴 때조차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주 6일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면서도 피곤함보다 뿌듯함이 훨씬 커 즐거웠던 예전의 내 모습이 아주 먼 과거일처럼 아련했다.

나는 일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졌고, 지친 채 하던 일에서 허겁지겁 도망쳤다.






2022년은 1년 내내 일만 생각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괴로웠다. 정서 상태가 불안정하고 작은 일에도 몹시 불안했다. 그 때문인지 집중력과 과제 정확도가 떨어져 스스로의 인지 기능에 불만족이 커졌다. 그러면서 우울감이 심해져 무의욕과 무기력에 압도당했다. 그래서 정말 스트레스받을 만한 건 아무것도 안 하고, 내가 하고 싶은 활동,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그냥 쉬고 놀았다.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숨어 있는데 몇 번이나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감사하지만 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적당히 이유를 대며 정중히 거절했다. 무기한 임상이 아닌 일회성 관련 업무에 대해서만 딱 한 번 용기를 냈을 뿐이었다.


2023년 초, 조금 색다른 제안이 왔다. 임상이 아닌 전공과 관련 있는 프로젝트 업무에 대한 제안이었다. 내가 신입으로 일할 때부터 관심이 아주 많던 분야라 신기하고 반가웠지만, 예전의 나였으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OK를 했을 테지만, 자신감이 바닥이던 난 우물쭈물했고 '맡은 일을 잘 해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냥 흘려보내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 우리 업계 쪽에서는 흔치 않은 제안인 걸 알기에 -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앉고서라도 일단 미팅은 해보기로 했다. 좋은 선택이었다. 두 번의 미팅, 몇 차례의 의견 교환을 거쳐 만족스러운 근무 조건으로 원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다.


반년 이상 팀원들과 의기투합하여 꾸준히 업무를 이어가며 자신감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여전히 어떤 일은 부담스러워 할 수 없었지만, 내가 자신 있는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하며 자괴감을 떨쳤다. 이 과정에서 프로젝트 구성원들의 수용적인 태도가 큰 힘이 됐다.






얼마 전 채용공고를 보다가 처음으로 '한 번 지원해 볼까?'란 생각이 스쳤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점과 적당한 급여 조건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화목'과 '수용', '분위기'를 강조한 기관에 대한 설명이 인상 깊었는데, 그 문장들이 투박했지만 어딘지 따뜻해 보였고 진실돼 보였다. - 물론 공고를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 지원해서 면접을 본다고 반드시 일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서류를 첨부해 눈 딱 감고 후다닥 메일을 보냈다. 자발적 지원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진짜 불안하고 떨렸다.

몇 시간 만에 연락이 와서 다음날 면접을 봤다.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서도 도망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런데 기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가구와 물건들에서 세월의 포근한 흔적을 느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한 공기가 벌써 반가웠다. - 아, 글을 쓰다가 기억났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당시의 기관 느낌과 똑 닮았다. 12년 된 기관이라 했으니 내가 일을 시작한 시기와 얼추 비슷한 때 생긴 곳이다. 그때 참 뿌듯하고 신났는데 - 원장님과의 대화도 매끄러웠다. 재지 않고 솔직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말했고, 궁금한 것도 대부분 물어봤다. 공고에 적힌 설명 그대로 나의 상황과 요구를 수용해 업무 조율을 했고, 원장님은 나를 채용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결정하기엔 불안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하루 더 고민해 보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아직 임상이 두렵다. 그렇지만 여기만큼 가깝고, 느낌이 좋고, 나에게 수용적인 기관을 만나려면 또 한참이 걸릴 것이다. 만약 내 느낌이 틀렸고,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다면 그때 바로 그만두면 된다.


처음부터 좋진 않았지만, 하다 보니 진심으로 좋아졌던 일이다. 나중에 너무 힘들었던 것도 맞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나를 많이 성장시켜 준 감사한 일인 것도 맞다. 다시 한번은 더 시작해보고 싶다. 이대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도망친 채로 끝마치고 싶지는 않다. 끝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해 그만두게 되더라도, 자괴감을 갖는 게 아니라 그런 나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편안하고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그래서 일을 하겠다고 답했다. 살아 있는 건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상처 입은 날개로 또 한 번 더 높이 나는 것이라 위로하는, 내가 힘들 때마다 찾아 듣는 노래 가사가 있다. 많이 회복되었으니 한 번 더 도전해 봐야겠다.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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