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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Oct 04. 2023

부부 여행의 딜레마 (2)

원하는 건 단순히 여행이 아니었다.

남편은 나와의 여행 시 약속대로 일하는 시간을 줄였고, 이후 몇 번의 여행은 만족스럽게 같이 잘 다니면서 문제가 이렇게 일단락되나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슬프게도)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는 걸 여실히 느끼게 되었다.


남편과 여행을 가면 남편은 '여행 메이트'가 아닌 '수행비서'인 것 마냥 행동했다. 내가 목적지를 알려주면 운전을 해주고, 무거운 짐이 있으면 들어주고, 뭔가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는 정도의 역할만 했고, 마치 임무를 얼른 마치고 퇴근하고 싶어 하는 직장인 같았다.

그래서 멋진 풍경을 볼 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여행을 같이 간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나 혼자 그 즐거움을 즐겨야 했다. 내가 소시오패스도 아니고 그건 당연히 불가능했고, 여행을 다니면서 나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사람 손이 잘 닿지 않는 선반 위 먼지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다 드디어 올해 4월, 경주 여행에서 내 불만이 폭발해 버렸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함께 여행을 못 하겠다고 남편에게 선포했다. 함께 하는 여행의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으니 차라리 혼자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혼자라면 옆사람 때문에 외로울 일도 없고 훨씬 더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았다.

남편은 처음에는 내가 그러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천천히 하나하나 설명해 주니 다행히 내가 혼자 여행을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해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운전하는 걸 많이 힘들어하기도 하고 완전히 혼자 갔다가 오는 건 아무래도 불안하니 여행지까지 데려다주는 역할은 하고 싶다고 했다.


경주에서 돌아와 바로 그다음 주에 계획을 실행하며 강릉으로 떠났다. 남편이 강릉까지 데려다줬고 이른 저녁을 함께 먹은 후 버스터미널에서 헤어졌다. 숙소까지 돌아오는 길이 조금 쓸쓸하긴 했지만 숙소에서 바다를 보며 책을 읽고 예능을 보며 거슬릴 것 하나 없는 완벽한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마음에 여유가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 이게 여행이지! 밤마다 남편과 통화를 하며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함께 하는 여행에서보다도 더 정서적 친밀감을 많이 느꼈다. 또, 연애할 때도 생각나서 아련하고 좋았다. 


그렇게 홀로 봄에 강릉도, 초여름에 원주도 잘 다녀왔다. 1박 2일로 짧게 다녀온 가까운 원주 여행 때는 운전도 내가 하며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여행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늦여름 떠난 강릉에서 또 나타났다. 아마 남편이 데려다준다고 함께 나섰고 봉평쯤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땐 정확한 이유를 몰랐지만 기분이 나빠졌고, 숙소에 도착해 나는 피곤해서 낮잠을 자겠다 했고 남편은 혼자 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떠났다.


낮잠에서 깨어 안목 해변길을 산책하면서 생각했다. 식당에서 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뭐 때문에 그렇게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는지. 잘 자고 일어나 맑은 정신이라 그랬는지, 알맞은 파도 소리에 집중이 잘 돼서 그랬는지 답은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꽤 인기 있는 식당을 갔는데 우리 빼고는 다들 즐거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대화를 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밥을 먹는데 우리만 서로 휴대폰을 보며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때 확실히 알았다,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나는 남편과 같이 여행 계획을 짜고,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여행지에서 소소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 여행 케미가 맞는 부부들이 부러웠고, 그래서 여행 때마다 남편에게 이유도 제대로 모르면서 만족이 되지 않으니 일단 심통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냥 여행'이 아니라 '여행 메이트와 같이 즐기는 여행'을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자 남편에게 이전보다 명확한 설명이 가능했다. 그날 밤 통화를 하다가 다음날 남편이 다시 강릉으로 오기로 했고, 남편이 정한 식당에도 가고 같이 해안길 산책도 하면서 남은 기간은 꽤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여행에 있어 남편은 내가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면 거기에 맞춰 노력을 할 뿐이지 멋진 풍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여행지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게 원래 타고 난 성향인 건지,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인 건지, 후천적 요인인 건지 이유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같이 즐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쉬울 뿐이다.

아마 앞으로의 여행에서도 내가 분명하게 원하는 걸 말해주어야 원활한 여행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해 꾸준히 노력해 주는 점 하나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서 되는 데까지는 남편과 계속 함께 여행을 가 볼 생각이다.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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