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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하늘 Oct 20. 2023

부부 문제 앞에 섰다.

연애 시절 대화가 잘 통한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을까?

- 이 글은 앞서 기록한 <부부 여행의 딜레마>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





여행을 다녀와서 애써 별일 없는 듯이 생활하다가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다. 비단 이 문제가 여행에서 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9월 중순의 어느 나른하고 심심한 오후였다. 햇살이 좋아 호수공원길 산책이 하고 싶었다. 자연스레 남편과 함께 하고 싶었고, 남편은 흔쾌히 같이 나서 주었다. (이 문장에서 '나서 주었다.'라는 부분을 대단히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제부터 문제 상황의 서막이 오른다.

호수를 보며 기분 좋게 걸으려는데 남편이 또 일 얘기를 시작한다. 나는 화제를 돌리려 일부러 다른 이야길 꺼내지만 남편은 내 말에 반응이 없다. 그저 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는 패턴이 이어진다. 내가 듣기엔 그게 그거인 일 얘기를, 내가 싫다는 사인을 반복해서 보내는데도, 뭐가 재밌다고 계속하는 건지. 나로서는 정말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결국 재미없으니까 그만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순간까지 맞이한 후에야 남편은 말을 멈춘다.

그리고, 가까스로 말은 멈추지만 그때부터는 옆에서 그냥 걷기만 하고, 전망이 좋은 벤치에 앉아 쉴 때는 내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만 본다. 이미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나는 화병이 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치솟는다.






"이렇게 각자 따로 놀 거면 우리가 굳이 같이 나와서 산책할 필요가 있어?"


결국 남편에게 날카로운 말이 나왔고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산책 후 가자고 얘기가 됐던 카페고 뭐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남편이 카페는 안 가냐고 했다. 보통의 사람들 같으면 분위기가 그러면 대충 집으로 가려나 보다 할 텐데 남편은 앞서 입력된 값이 있는데 그대로 진행이 안 되니 구태여 물어본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헛웃음이 나면서도 동시에 '그치, 이게 내 남편이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희한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마음을 돌려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늘 먹던 대로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남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다음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페는 드넓었지만 손님이 거의 없었고 공간은 적당히 분리되어 있어 우리 테이블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이제부터 조용히 진지한 이야기를 얼마든지 마음껏 나누어 보라는 듯이.


남편에게 먼저 물었다, 우리에게 요즘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냐고. 아니 예전부터 있던 문제가 요즘 더 심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 같지 않냐고.

남편은 그렇다고 했다. 그렇게 느끼면서 왜 말을 안 했냐고 하니, 늘 내가 먼저 말해줘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헐.


(아, 그랬구나. 내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러면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까? 핵심이 '대화'인 건 알겠는데......


"스몰 토크('가벼운 대화' 정도로 해석하는 게 더 알맞겠다)가 너무 안 돼서 답답해."


"어떤 가벼운 소재를 꺼내도 항상 지식적이고 사실적인 답으로만 길게 반응하니까 재미가 없어. 거기에 별로 이어서 할 말도 없고.


"어떨 땐 내 말에 반응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기분이야."


"연애할 때는 서로에 대해 모르니까 그것들에 대해서만 말해도 새롭고 재밌었지만 이젠 그것도 안 되고, 뭐 하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취미도 없고 관심사도 없고. 사실 무슨 얘길 같이 나눠야 할지 모르겠어."


시작이 어려웠던 것에 반해 막상 말을 꺼내니 속에 있던 것들이 의외로 술술 나왔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남편의 반응은 스몰 토크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거였다. (보통의 사람들 같으면 이런 부정적인 말들에 일단 감정적으로 먼저 반응했을 것 같은데 역시 남편다운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우리는 스몰 토크는 보통 어떻게 시작하는지, 상대방의 가벼운 말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대화를 할 때 상대방과 어떻게 턴을 주고받는지, 대화의 양은 어떻게 분배하는지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임상에서 일을 하는 기분이었다.)






대화를 하며 적당히 타이밍을 보다가 호수길을 걸으며 갑자기 깨닫게 된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걸 분명하게 몰랐다가 알게 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걸 '유레카'라고 하던가!)


- '남편이 계획하는 재밌는 일정' -


이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의 핵심이었다. 언젠가부터 놀이 계획은 늘 내가 짰고, 나는 내가 계획해야만 진행되는 놀이에 완전히 싫증이 나있었던 것이다.


나는 원체 노는 계획 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할 사람이 없을 때만 어쩔 수 없이 나서는 사람이다. 노는 행위 자체도 자주는 피곤해서 싫어하며, 가끔 환기가 필요한 적시에만 누군가와 같이 어울려 놀며 기분 전환을 한다. (나갈 땐 귀찮았지만 가서는 의외로 즐거웠던 약속들도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부턴 재밌을 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 약속에 나가고 있다.)

여행도 패키지여행이나 누가 주도하는 여행을 선호한다. 누군가 주도하면 따라가서 보조자 역할을 하는 게 좋고, (이건 큰 장점 같은데) 조금 마음에 안 들더라도 준비한 사람에게 감사하며 딱히 불평을 한다거나 싫은 기색을 나타내지 않는다.

요컨대, 나는 노는데 무척 수동적인 사람이란 얘기다.


그런데 이런 내가 놀이의 모든 걸 주도해야 하다니! 놀기도 전에 기운이 다 빠져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남편은 나에 비해 음식 맛이나 숙소에 불평불만도 많아 그걸 신경 쓰다 보면 기운이 몇 배는 더 빠졌던 것이고.)


이야기를 모두 하고 나니 속이 아주 후련했다.

남편은 이번에도 또 남편답게 나의 정확한 디렉션에 만족했는지 내가 원할 때는 (내 취향을 고려해서) 자신이 놀이 계획을 짜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10월 중순에 남편과 함께 다시 호수공원 산책을 하고 카페에 갔었다. 똑같은 장소, 비슷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지났을 뿐인데 분위기는 천지 차이였다. 남편은 내 말을 잘 들어줬고, 일 얘기도 별로 안 했으며, 우리의 얘기 혹은 가벼운 이슈들로 대화를 했다.

산책, 일몰 감상, 남편과의 대화로 이루어진 2시간 덕분에 하루가 꽉 차게 행복했다.


다시 희망이 보인다. 우린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 공감, 댓글, 구독에 생각보다 힘이 많이 나더라고요. 모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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