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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의 서 Oct 15. 2024

자매의 비밀

저녁 이후 친구들이 하나둘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할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네들의 인사를 받는다. 딸의 친구들은 모두 딸과 같은 별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졸업 후엔 더 이상 함께하지 않았으면 했던 녀석들이 여전히 그림자처럼 딸의 곁을 맴도는 게 싫었다. 게다가 이들이 만나면 빈병이 박스채 현관 앞에 쌓인다. 혁명의 색깔을 입은 박스를 걷어차며 할머니는 누군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혀를 찬다.

“딸애들이 무슨 술을 이렇게!”

호기심에 단 한번 들어섰던 이 낯선 세계의 대화는 밤새 격렬하고 위태로웠으며 자유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비밀스러웠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그때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든 투쟁의 시작에 관해 물었던 것 같다.

“아버지. 우체국장이셨지.”

뜻밖의 대답이었다. 할아버지는 내 엄마의 별이었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할아버지의 인품, 학식 그리고 정의로움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 그려지고 있었다. 어쩌면 글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두 자매의 아버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이중성을 오랜 시간 숨긴 채 자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두 개의 이야기를 혼자 간직하는 동안 나는 지극히 사적인 역사의 서고를 맡은 비밀 사서인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서고의 문을 열고 이 모든 이야기를 공개하기로 한 것은 그에게서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나 너네 엄마한테 데려다줘!”

외모도 성격도 가장 많이 닮았지만 너무 다른 자매, 그의 기억이 온전할 때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서로 간의 거리를 잘 유지할 수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의 실체가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오직 나만 알고 있었기에 젊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망각에서 비롯된 요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때론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더 안전하지 못할 때가 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고 우애 좋은 대가족이었다. 그런 나의 외가는 결혼적령기 아빠의 최우선 선택지였다. 하지만 수년 후 외가의 막내는 수배자가 되어 도망 다녔고 감옥에 갔고 정상 사회로 들어설 수 없는 외부인으로 살다가 지금은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진단을 받았다. 아빠는 대뜸 엄마에게 막내 처제를 보살피라 권하지만 사정 모르는 이의 억지일 뿐이다. 자매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그들도 모르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어찌 되었건 두 사람의 거리를 지켜줘야 한다. 그래서 비밀의 서고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상이한 기억들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자매의 아버지는 해방 전후 우체국장을 지냈고 상당한 땅과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적지 않은 아들 딸들을 교육시키고 대학에 보냈다.


마키아벨리와 마르크스, 프롤레타리아 혁명사에 빠져 있던 여대생의 영혼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사료였다.

지하 수장고에서 꺼내온 보관함처럼 한 밤에 2층 계단방으로 끌어올린 크래프트지 상자는 진회색 먼지로 오염되어 있었고 비틀어진 뚜껑을 여니 온갖 빛바랜 종이들이 뒤엉켜 매캐한 습기로 가득했다. 눈에 띄게 배가 부른 서류봉투를 꺼내 뒤집으니 낱장의 사진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사진은 너무 오래되어서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고 어떤 것은 필름채 바닥에 나뒹군다. 순간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역사를 전공한 그였기에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긴 사진들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보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역사학자의 모양새는 아니어도 적어도 마리야 스테파노바의 ”기념물“처럼 임의로 분류만 해두었어도 알아보기 쉬웠을 것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진들, 봐도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이 미스터리한 기록들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가려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내가 아는 정도로만 사진들을 분류하다 렌즈와 다투고 있는 한 살배기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낡은 흑백 사진이었지만 투쟁적 생의 궤적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이 그에 관한 예언적 문장처럼 읽힌다. 잘 차려 입힌 옷, 바로크풍 안락의자, 그리고 다섯 손가락에 끼운 빛나는 반지들, 이 모든 것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것들이라고 일그러진 표정과 두 눈이 맹렬하게 쏘아 부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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