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암울했던 대학 과정을 마치던 그 겨울, 칙칙한 가운을 부자연스럽게 걸치고 엄마와 오빠 사이에서 어색하고 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진은 그의 번호가 울릴 때면 어김없이 함께 나타난다. 가장 똑똑한 아들, 딸이었고, 기준은 아이들 중 가장 좋은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한 아이는 가장 돈 안 되는 전공을, 다른 아이는 돈을 다루는 과를 선택했다. 어쩌면 이들이 가족의 혈통을 지탱하고 있는 이중성의 산 증거인지도 모른다. “성좌적 연관”, 이 극단의 가족사를 단번에 빨아들이는 벤야민의 탁월한 이미지다. 자랄 때부터 그들은 너무 달랐다. 성향도, 좋아하는 책도, 놀이도, 무엇보다 분명하게 성별도. 누가 봐도 양극단에 있는 두 사람은 가족이었다. 빛바랜 서류봉투가 토해낸 엄청난 양의 사진은 대개가 흑백이었지만 9남매의 막내들만은 천연색 컬러로 남아 있다. 흐릿한 윤곽선이 내뿜는 아우라는 가족사의 온갖 얼룩들을 미화하고 단절된 기억의 틈을 신화로 엮으려 들지만, 근래의 것인 마냥 또렷한 남매의 표정과 시선이 현실의 왜곡을 막아선다.
그의 엄마, 그러니까 내 엄마의 엄마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딸들은 그런 엄마를 닮지 않았다. 외모만이 아니다. 여성스러움에 대한 강요를 극도로 혐오했던 그는 의도치 않게 페미니즘적 성향의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아버지보다는 엄마에게서 유래한 것이었다. 아들과 딸을 지극히도 차별했던 엄마의 태도는 자녀의 자녀에게까지 이어졌고 미혼의 막내는 그 악습의 되물림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고집스러움이 없었다면 대학 진학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제한되어 있었다. 가부장적 질서를 수호하고 지탱하는 것은 집안의 여성이었고 굳이 남성들이 애쓸 일은 없었다. 잠시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시절 숱하게 듣던 네 글자가 그 모든 불합리한 사정을 정확하게 요약해 준다.
“딸아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 던 예언자의 전언이 몹시도 불편한 것은 그런 식의 분류가 엄마의 가계서 재현되었기 때문이며 할머니는 그 사자의 엄격한 대리자였다.
하루 두세 차례 울리던 전화벨이 뜸해졌다. 여러 가지 신체검사와 정서적 안정을 이유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된 서울살이가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한동안 그는 몹시도 불안해했다. 유년 시절 두렵기만 했던 막내 오빠 가까이에 얼마나 길어질지 모를 정주의 짐을 풀고는 산책로며 도서관, 일상을 위한 거점들을 익히는데 꽤 공을 들여야 했다. 처음엔 길을 찾는데 필요한 좌표가 그려지지 않아 애를 먹었고 현관문 번호를 금방 기억해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억회로에 장애가 생긴 것도 문제지만 그의 고향은 삼십 년의 시간 동안 너무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풍경이 기이했다. 이름난 대규모 카페가 길 건너 하나씩 자리 잡은 것도 생경하지만 장시간 커피와 수다를 제공받은 값을 지불하려 하자 점원이 당황스럽게 건네는 말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이렌오더로 이미 결제하셨는데…”
낯선 단어의 조합에 거리의 간판을 어눌하게 읽으며 글을 익히던 그 시절처럼 매장의 선반과 벽들을 빠르게 훑던 그는 초록 세이렌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긁적인다. ’저 녀석 <이> 아니면 <에게> 주문하는 건가?‘ 두 친구가 팔을 잡아끄는 탓에 혼자 생각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카페를 나왔다. 늦여름 오후 햇살이 따갑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옅은 현기증이 일고 세이렌의 감미로운 환청이 그의 걸음을 멈춰 세운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낯선 기보법인 듯 숫자들로 울려온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숫자들에 귀를 대니 멀리서 막내 오빠의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지나간다. 졸업 후 한동안 대기업 자금을 관리했던 오빠는 이 특별한 세이렌을 누구보다 탁월하게 다룰 것이다. 여지없이 지금은 기억을 잃어가는 그의 숫자들을 도맡았고 그렇게 엄마와는 다른 유형의 대리자가 도착했다. 귀를 막은 친구들은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처럼 자기 길을 가고, 그만이 망각의 기둥에 묶인 채 그림자를 삼킨 태양 아래 힘겹게 서있다. 언제, 어디에 다다를지 모를 이 기호의 바다-문자와 숫자와 사진들로 이루어진-를 그도, 그를 쫓는 나도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