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유형지의 죄수는 살아남았지만 자유로운 육체로 할 일이 없다. 다시 항해를 떠나는 탐험가를 쫓아가 보지만 이미 보트는 떠나고 위협적인 탐험가의 몸짓에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가 없다. 그의 생에 새겨둔 네 글자 ‘민주투사’는 그렇게 카프카의 죄수가 묶인 유형지와 같다.
지방 소도시의 감옥처럼 숲 속에 둘러싸인 제주집에는 단 하나의 책장만 옮겨왔다. 이사를 결심하고 서고의 책들을 수도 없이 내버렸다. 대학시절부터 보관해 오던 역사서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숱하게 논쟁을 일으켰던 문제의 서적들, 움베르트 에코와 시오노 나나미, 카프카와 같은 이야기꾼의 활자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로지 살아남은 것은 이야기꾼뿐이었다. 기억 세포는 줄었지만 책에 대한 강박적인 정리벽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딱딱한 돌침대에 누워 마주 보는 소박한 서고는 이름과 색채와 크기에 따라 섬세하게 건축된 책등의 파사드를 지녔다. 잠시 피곤한 몸을 뉘어본 침대는 내 등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고 발끝에 선 책장은 그림같이 평면적이다. 책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잠든 활자들이 혹 깨어날까 단단하게 보초를 서고 있고, 유리를 뚫고 들어온 빛의 창살은 한걸음만 내딛이면 닿을 책과의 접촉을 가로막는다. 꼽추의 허리처럼 침대에 붙은 등이 아파 오고 죄수의 몸에 판결문을 새겨 넣는 유형지의 기계가 떠오른다. 벌떡 일어나 짜증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매일 이 침대에서 이렇게 유형지의 시간을 되새기는 거야?"
"..."
"침대 바닥이 너무 단단해. 도무지 등을 펼 수가 없어. 잠은 좀 편하게 자면 안 돼?"
"..."
돌아오지 않을 대답 대신 천연색 표지와 표제들 사이에 유독 두드러진 검은 띠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검은 바탕의 책등엔 아주 가늘고 새하얀 격자형 창살이 새겨져 있고 그 사이로 비밀 문자처럼 작은 활자 몇이 구원의 손을 기다린다. 아픈 허리 때문에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 끝에 걸쳐 앉은 나의 눈동자가 창살에 위험스럽게 매달려 있는 활자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문자 살해 클럽"이라니. 언뜻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 모임의 구성원도 그가 지나온 시절만큼이나 암울하고 비밀스러운 시대를 겪었나 보다. 일차적으로는 책등의 표면이 그런 분위기를 암시하고 이어 확정적 단서가 드러난다. 발음조차 낯선 열두 개의 활자-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공교롭게도 그가 기억을 잃은 나이에 이 키예프 남자는 생을 마감했다. 먼 이방 작가의 옛 활자가 언제 어떻게 번역되어 서고로 들어왔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역사책 속에 파묻혀 살던 그에게 기억의 소실은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검은 활자의 유령이 카프카의 탐험자처럼 그에겐 뜻밖의 구원자일지 모른다. 수없이 반복해 되살려야 하는 그의 기억을 치료하기 위해 이 검은 띠의 활자들을 따라 클럽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꽉 맞물린 책등을 비집고 클럽의 첫 장을 여는 순간, 예감이 나쁘지 않다. 그건 정의할 수 없는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주인은 엄마의 장례에 다녀오고자 자신의 장서를 팔아치워야 했고 이런 이야기의 시작은 작가의 것이기도 하다. 우연히 작가의 활자들을 얻게 된 그 역시 엄마가 떠나고 얼마 후 이 망각의 땅으로 이주하였다.
비밀 회합의 첫 시작은 이러했다. 텅 빈 서고로 둘러싸인 정사각형의 방엔 붉은색 벽난로를 마주한 채 의자들이 반원을 그리고 있고 거기엔 서로를 의미 없는 음절로 부르는 남자들이 앉아 있다. 토요일이면-집주인의 엄마는 토요일에 사망했다- 오로지 검은 서고의 침묵에서 건져낸 단어들로 세상에 없는 이야기가 태어난다. 활자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가만히 지켜보니 작가는 그가 비워 낸 방에 ‘작가’가 아닌 ‘청자’로 초대된 것 같고 가끔 다섯 남자의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거의 듣는 일에 충실해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연기자들로 시작된 이야기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셉트>의 영혼 문제로 전개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클럽의 문이 닫혔다. 얼떨결에 활자들에게서 밀려 나온 나는 “펼쳐진 두루 마리 사이”에 죽어있는 셉트라는 두 글자를 자꾸만 되뇌었다. 소리 ‘셉트’를 내가 아는 글자 모양으로 그려보니 ‘SEPT’로 형상화된다. 7이라는 숫자다. 그의 엄마는 일요일에 사망했다. 어쩌면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도 같은 날 이승의 기한을 다했는지 모른다. 이야기를 더 듣기로 한 다음 토요일은 책장이 덮이고 영원히 사라졌다. 청자로만 텅 빈 서고에 머물렀던 작가가 글자들을 꺼내드는 순간 이야기꾼의 입이 봉인된 것이다.
무엇을 찾는지 그가 방안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어수선하게 살핀다.
“뭘 찾아? “
“…”
“뭘 찾는데?”
“펜“
책장 맨 위칸 조그만 나무통에 꽂아둔 색연필을 뽑아 그에게 건넸다. 수많은 색 중에 하필이면 검은색을 손에 쥔 것은 우연이었을까. 알아볼 수도 없는 작은 글씨로 알 수 없는 숫자들을 쓰는 그에게 물었다.
“뭐 하는 거야?”
“…“
혹시 셉트처럼 망자의 입에 물렸다 떨어뜨린 오볼(고대 로마의 동전)을 기다리며 엄마의 혼이 그 곁을 떠돌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병이 시작된 후 그는 활자들을 멀리하고 숫자들에 집착했다. 그토록 좋아하던 책을 선물해도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어때? 이야기가? “
“…”
세이렌의 커피점에 함께 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주 일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텅 빈 서고에 활자들을 채워 짧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훈련부터 시작할 참이다. 바람이 탐험가의 돛을 그에게로 몰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