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행>
프랑스 남자와 어쩌다 보니 발리에 왔다. 데이트는 고작 서너 번 정도 한 것 같은데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본분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통장 잔고는 꽤 쌓였는데 여행을 한 번도 못 갔다. 마침 휴가도 받았고 좋은 타이밍인 것 같기도 하고. 1시간 만에 가방을 후다닥 챙기고, 젯스타의 항공권을 구입하고, 정신 차려보니 공항.
길리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아메드까지 스쿠터로 이동하니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도착했다. 아메드에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아침 길리 섬으로 들어오는 보트를 탔다. 상인들은 나에게 재패니즈 나며 계속해서 물었고 한국인이라고 답했더니
“한국사람들은 여기에 없어. "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길리 (Gili Trawangan) 에는 한국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금은 한국 관광객들의 필수코스 겠지만. 화려할 것 하나 없는 작은 섬이다. 섬 끝에서 끝까지 돌아보아도 같은 풍경이 전부다. 자전거가 많고 비슷한 색을 가진 작은 섬. 딱히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길리섬으로는 다들 크게 할 일이 없기를 목표로 삼고 오는 것이다. 그저 해변을 걷고, 맥주를 마시고 썬배드에 누워 햇살을 온몸으로 맞는다. 나도 풀빌라의 수영장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물속에서 팔만 겨우 손을 뻗어 전화기를 들고 룸서비스로 술을 무진장시켰다. 사람은 둘인데 칵테일이 4잔에 독한 보드카가 3잔. 프랑스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금방 마시고 또 시킬 거니까 한 번에 시키고 취해버리자고 내가 말했다. 나는 취해있는 기분이 좋았다. 술에 취하면 취할수록 오늘의 현실은 잊을 수 있다. 꿈속에 둥둥 떠있는 기분. 마치 지금 여행처럼.
저녁에는 프랑스 남자와 일본식으로 꾸며진 일본 음식점을 갔다. 저 돌돌말이 김밥을 스시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음식점의 이름은 스시집이고 우리가 먹은 것의 이름이 스시이니 그냥 꾸준히 스시라고 불러야 하나. 그가 처음으로 나무젓가락을 쥐고 젓가락질을 연습하던 날이었다. 고추냉이 먹기 내기를 하고, 맥주를 많이 마셨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참 즐겁다고 계속해서 말했다.
골드코스트에서 친구들과 모두 모여 클럽을 놀러 갔던 어느 날, 한참 술을 마시고 놀다가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지하에서 벗어 나왔다. 프랑스 남자는 자기도 담배를 피우겠다며 나를 따라 나왔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새벽 2-3시.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고함을 지르고 소란스러운 새벽. 우리들은 해변 앞 클럽 벤치에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는 이야깃거리를 찾으려 애쓰다가 노쓰 코리아에 대해 물었다. 술에 취한 나는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가능한 만큼의 설명을 주절주절 떠들었다. 다음날 음흉한 눈빛을 던지며 나의 이야기를 기다리던 친구에게 "걔가 나 담배 피우는데 따라 나오더니 북한에 대해 묻더라. 걔 뭐야. 꼬시러 나와서 무슨 북한 얘기를 해. 웃겨." 친구는 "걔 담배 안 피우는데?" 하고 말했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