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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JANE Jun 11. 2022

나의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

<첫 동거, 첫 싸움>

섬을 떠나 다시 배낭을 챙겨 매고 항구에서  시간을 운전해 문자로 받은 주소에 도착했다. 어느 조용한 주택가였다.  이곳까지 왔냐는     채만이 덩그러니 자리했다. 아무런 연락도 되지 않았다. 햇살이 너무 좋은 날이라 너털웃음부터 났다.


일자리를 주겠다고 해서 돈부터 덜컥 보내버렸는데. 사기였다. 우리 둘은 강제로 갈취당한 몇백 불의 의미를 잠시 되새김질하다가- 근처의 경찰서에 가보기로 했다. 나는 프랑스 남자를 옆에 세워놓고 장황한 상황 설명에 들어갔다. 빳빳이  다려진 제복을 입은 백인 경찰이  말을  알아듣겠다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나의 눈동자가 흔들리던 찰나, 경찰은 그런 나를 보다가 프랑스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프랑스 남자의 외국어란 고작 번역기에 의존하는 날들이  많은 수준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허접한 영어를 내뱉으니 경찰은 그제야 알아들겠다며 서류를   가져다주었다. 백패커들에게 흔한 사기를 당한 것이라고 했다.


"너희들 돈은 못 찾을 거야. 그냥 잊어버려. "



잊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또박또박, 가장 쉬운 단어만 골라 만든 문장이었다. 나를 쳐다보며 대놓고 고개를 절레 저었던 그가 프랑스 남자에게 웃어 보이며 위로를 건네던 표정이 잊히질 않는 것이었다. 후에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함께 목격한 최초의 차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또다시 언제, 어디에서나  말을  알아듣는 척을 하는 사람을 만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 내가 위험할 ,  말을  알아듣는 척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쩌나?


나를 듣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울 수도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종종 이 거대한 나라안에서 내가 한 톨의 먼지만큼이나 조그마한 사람이라고 느끼곤 했다.


▲ 다시 섬을 떠나, 도시로.





그녀는 성질이 더럽고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중년의 백인 여자였다. 특히나 동양인들에게는 가차없기로 유명했다. 수십 번을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지만, 거들떠도 안 보던 그녀를 뒤로한 채 분에 씩씩거리던 검정 머리칼을 한 사람들을 보곤 했다.


내 차례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려왔는데. 어찌 저찌한 사유로  일자리를 다른 이에게 넘기겠다는 전화가 왔다. 나는 화를 참을  없었다. 사무실에 버선발로 쫓아갔다. 일자리를 구걸하기 위한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기다랗게 줄을  있었다. 파란 눈을 하고 샛노란 머리색을 가진  여자에게 소리를 질렀다. 분에 가득  목소리로 나는 악을 썼다.   아니라는  나의 순서를 휴지통에 처박아버린 저 여자를 향해 절망에 가득  목소리를 냈다. 모두가 나와  앞에 서있는 백인 여자를 번갈아 보며  있었다.


"쏘리"


한 숨의 침묵이 지나고 꼬깃 꼬깃했던 나의 순서가 휴지통에서 구제되었다. 새카만 머리색을 한 여자가 소리치는 것을 마주한 그녀는 꽤나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일부터 출근을 하라고 했다. 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뒤돌아 사무실을 나와서야 얼굴이 화끈거린 것이 느껴졌다. 왜인지 눈물이 왈칵 터질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야 내가 이곳에서  인간답게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텐트에서 살아서,  위에서 떠돌아서, 제대로  직장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 적은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사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한동안 나를 슬프게 했다. 나의 머리색으로, 눈동자 색으로,  권력을 휘두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슬픈 일이었다.  


나는  날의 싸움으로 미약하게나마 한 톨의 먼지 같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있게 되었다. 나의 어깨가 요만큼 올라갔다. 노란 머리색을 가진 사람과의  싸움이었다.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 나에게 프랑스 남자는 박수를  주었다. 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본 네 모습 중에 가장 멋졌어. 너무 잘했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며 그는 익살을 부렸다. 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그 익살에 함께 웃었다. 누군가와 싸우고 칭찬을 듣기는 또 처음이다. 머쓱했지만 어쨌든 이겼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의 이곳에서의 날들은 오늘의 일로서 또 살아지겠지. 나는 여전히 작지만 작지 않은 척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뼘만큼 자랐다고 생각했다.


사기를 당한 주소에 놓여져있던 호주 멜버른, 어느 집 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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