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ONJANE Feb 20. 2020

아이를 낳고, 입양도 하는 건 어때

가족의 버라이어티화

어느 친구 커플은 두 살 난 아이가 있지만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서로의 남자 친구, 여자 친구로 살아가고 있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고 남편과 부인이 되면 더 좋겠다고 가끔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딱히 부족할 것도 없이 평범한 가족이다. 어느 친구의 아버지는 동성애자다. 서로를 인정한뒤에도 여전히 각자 부모로서의 역할을 하며 지낸다. 나의 남편의 부모님은 30년째 함께 살고 있지만 결혼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완전 남남인셈. 그리고 장장 30여 년의 세월을 기념하여 내년에는 결혼을 하기로 했다. 가슴 벅차오르게 기대되는 결혼식이라 우리 둘은 지금부터 무슨 옷을 고를지 호들갑이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눈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이 세상엔 정상인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 정상은 뭔데? -그러나 편견 가득 찬 한 꺼풀을 벗어내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 정상의 기준도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프랑스에선 이게 정상이고, 한국에선 비정상이고. 캐나다에선 이게 정상인데? 그러나 7시간을 반대로 날아가면 프랑스에선 또 비정상이고. 아이가 셋이나 있지만 여전히 부부가 아닐 수도 있고 부부이지만 아이가 한 명도 없을 수 있다. 결국 세상의 모든 비정상은 정상이다.


결혼 전에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것이 두려운 주제였다. 나는 여전히 성숙하지 못하고, 무능력하고. 나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무거웠기에 결혼은 했지만 더 잘생긴 남자와 데이트하고 싶어 지면? 임신은 완전히 여자만 희생해가며 하는 일인데? 나는 그때까지 진심을 다하는 일에 어색했고 임신에는 더욱 관심 없기에 우리 결혼은 하지 말자. 아이 낳기는 싫어. 오케이. 라는 이야기를 남자친구와 여러 번 나누었다. 나는 지금의 남편에게 진지하게 프로포즈를 하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다. 그렇게 결혼이라는 단어를 쏙 빼놓고 연애를 했다. 나는 가끔 아 이렇게 10년 20년 연애만 하면 좋겠다 그치? 라고 종종 말했다.


나는 친구의 게이 아빠와, 결혼하지 않은 나의 시부모 곁에서 나의 편협했던 고정관념들이 찬찬히 무너져가는 날들을 보았다. 게이 남편과 이혼하게 되면 평생 남편을 미워하며 다시는 사랑하지 못하며 사는 게 답일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남자 친구와 아이를 낳으면 나는 미혼모가 될 것이고, 남자 친구는 언젠가 이 모든 책임을 지지 않고 나를 떠나 다른 여자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고, 그 뜻은 이 남자가 나를 떠날 것이기에 내가 불행해진다는 아주 슬픈 이야기. 나의 삶과 행복이 누군가에게 의탁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


행복에 정답이 있다면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적당히 크고 괜찮은 집, 좋은 직장, 엄마와 아빠. 남자와 여자. 보통의 가정. 보통의 사람들.


아빠의 '아' 자에도 안 어울리던 친구가 아빠가 되던 날, 그 생명의 탄생에 진심으로 기뻐해 주지 못했던 사람은 검정 머리를 한 어느 한국인- 나 혼자였다. 아무리 네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프랑스인 이어도 세상에 준비된 부모는 없으니까 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지 않니? 라고 말했던 내가 있었다.


진짜 이렇게도 잘 살 수 있다구? 이렇게 갑자기 임신해놓고? 모아놓은 돈도 없고 변변찮은 직장도 없는데? 그래 제발 좀 증명해줘라. 사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정말로 묻고 싶었던 말일 수도 있다. 내가 그런 줄 알고 믿었던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증명해 보이기를 바란 것일.


대학을 가야지, 취직을 해야지, 결혼을 해야지 그러면 아이를 낳아야지,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살다가 이미 몇 순서를 어기긴 했다. 대학엘 갔지만 졸업하지 않고 고졸로 살기, 취직 안 하고 아르바이트로 삶을 연명하기, 결혼은 안 했지만 남자 친구와 동거하기 feat 그렇게 엄마 걱정시키기. 이미 보통의 사람들이 따르는 일련의 순서를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았으면서도 여전히 나 혼자만이 이들이 부모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나는 아주 부끄러워졌다.


이것은 내가 어떤 남자를 사랑하고,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해 줄 것이고 해서 대단한 결심을 했다는 어쩌고 저쩌고 와는 다른 종류다. 사랑을 믿었다면 결혼과 임신은 끝까지 나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단순히 남자를 너무 사랑해서 또 다른 인간을 키워내고 싶다 하기에는 지금 세상이 영 변변찮지 않나. 현 흐름을 좀 못 읽는. 그건 좀 이기적이지 않나 싶고.  


결혼 하지 않고 30여 년을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로 살아온 나의 시부모를 진지하게 인간적으로 존경하기 시작할 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흥미를 잃었지만, 결국 다시 인간을 보고 무언가를 다시 해 보고 싶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삶이란 참으로 아이러니 그 자체인 거지.


결혼 협상에 들어가며 자녀는 하나 혹은 둘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에 합의를 했고 세상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도 동의를 했다. 더 이상 세상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데도 정말 아이를 낳는 것이 가치 있을까? 우리는 그 의미를 계속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또 원한다면 어쩌다 운이 없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 주기로 했다.


2016,파리



누군가는 더 이상 인간에겐 희망이 없다고 했고 나는 그것에 동의했지만 다시 희망 있는 삶을 꿈꿀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인간뿐일터. 나머지의 삶도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로 이루어진다면 이왕이면 더 가치 있는 것들을 택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하는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동물을 사지 않고 입양하기, 부모가 없는 사람의 부모가 되어주기. 지금은 2020년이고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받는 세상에 산다. 가족을 선택하는 것도 삶의 여러 선택지 중 하나다. 엄마가 둘인 가족. 혹은 아빠와 다른 아빠와 나. 다른 피부색의 가족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은 세상.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하얀 얼굴과 노란 얼굴을 한 부부고 우리의 아이는 어떤 색이든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여기에 다른 얼굴색의 인간이 하나 더 껴 있더라도 딱히 더 이상 할 것도 없다.


대단한 선행심도 봉사도 아니고. 아무리 떠들어봤자 세상은 쉽게 바뀔 리 없으니 더 유난스럽게 떠들며 특별하고 싶다. 길 잃은 아이를 하나 입양한다고 해서 우리가 시리아의 모든 전쟁고아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가치 있는 행동과 생각이 세상에 꽤 많은 의미를 가지기를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프랑스인들이 고양이와 사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