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 베를린 유년시절 읽기

첫번째

by 미학적 인간

이 글은 벤야민의 생애를 충실하게 재구성해 보여주려는 전기도,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전달하려는 이론서도 아니다. 이 책은 <베를린 유년시절>이라는 아름다운 텍스트를, 바로 그 파편적인 형식 속에서, 읽어보려는 시도이다. 그 사이 사이에, 유사성, 미메시스, 기억, 경험과 역사에 대한 벤야민의 사유들이 함께 배치될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발터 벤야민은 누구보다 기억의 복합적인 특성을 잘 이해하였고, 그를 사유의 중요한 단초로 삼았던 인물이다. <베를린 연대기>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기억 Gedaechtnis 이라는 말은 기억이 과거를 탐색하는 도구가 아니라 과거가 펼쳐지는 무대라는 것을 오해의 여지없이 밝혀준다. 땅이 죽은 도시들이 묻혀있는 매개체이듯 기억은 체험한 것의 매개체이다. 묻혀있는 자신의 과거에 다가가려는 사람은 땅을 파헤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상 Erinnerung의 어조와 태도를 규정한다. 진정한 회상은 똑같은 내용에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것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흙을 흩뿌리듯 그 내용을 흩뿌리고, 땅을 파헤치듯 그 내용을 파헤치는 것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Walter Benjamin, GS VI. 486-487. )


벤야민은 기억이 과거가 펼쳐지는 무대이며 거기에 우리가 체험한 과거가 몰락한 도시들처럼 묻혀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과거를 떠올리려는 사람은 그것이 묻혀 있는 곳으로 찾아가 그를 파헤쳐 보아야 한다. 거기에 깊숙이 묻혀있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흙 무더기를 하나 하나 집어 흩뿌려보고, 한번 보았던 곳을 다시 한 번 꼼꼼히 뒤져보고, 혹 파내버린 흙 속에 무엇인가 흘려버리지 않았는지 주의깊게 다시 더듬고 만져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벤야민이 ‘회상 Erinnerung’이라 부르는 이러한 발굴 작업을 통해서도 기억 Gedächtnis 속에 묻혀 있던 모든 과거가 다 떠올려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찾아낼 수 있는 과거라는 것도, 보물로 가득 찬 상자처럼 한꺼번에 발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묻혀있는 과거의 체험들이란 조각나 부스러진 파편들처럼 흩뿌려져 있기에 찾아낸 그 파편들로부터 과거의 그림을 그리는 일은 우리 스스로가 행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벤야민은 회상이란 과거를 그것이 있었던 그대로 길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회상해 내기 전에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그림들”을 직조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1900년경 베를린 유년시절>은 이러한 회상 작업의 산물이다. 거기서 벤야민은 자신의 기억을 조심스럽게 더듬어가며 과거의 그림들을 직조해낸다. 그렇게 그려낸 과거의 그림이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라 회상을 통해 비로소 직조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 그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을 두 동생 - 스테판 벤야민, 도라 벤야민 - 이 여기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 유사해지기를 요구’함으로써 벤야민을 불편하게 했던 사진 찍기에 대한 회상에 난데없이 어린 프란츠 카프카의 사진 모습이 함께 섞여들고 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회상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기억 속의 부스러기 파편들로부터 어떤 것이 과거의 모습으로 떠오를 것인지는 현재의 욕망 또는 결핍에 의해 좌우된다. 손으로 더듬어 찾아낸 과거의 부스러기들을 부어 넣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결정화되어 나타날 것인지는 우리의 욕망과 결핍에 따라 그때마다 서로 다른 모양과 크기를 갖는 필터에 따라 달라진다. 거기에 그려진 사물이 과거의 그것보다 작아졌다면 그건 우리가 다가가는 사물의 절반을 가져가 버리는 망각이라는 곱추 난장이 때문이다. 기억이란 우리가 본 것이 아니라 그 곱추 난장이가 우리를 바라 본 순간 생겨나는 그림이며, 그래서 거기엔 필연적으로 망각이 전제되어 있다. 회상하는 이가 손으로 더듬어 찾아낸 과거의 부스러기들을 한 땀 한 땀 꿰매어 넣는 자수가 회상이라면 망각은 그 바느질이 행해지는 자수판이다. 회상을 통해 떠오르는 과거의 그림은 이 희거나 검은 망각이라는 자수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회상된 과거의 그림에는 망각이 함께 직조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회상된 과거의 그림은 꿈의 그림과도 같다. 꿈이란 먼 과거의 체험이 우리의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과 결핍에 의해 가공 - 망각, 압축, 치환.. - 되어 떠오른 상상적 그림이니까. 그렇기에 회상을 한다는 것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900년경 베를린 유년시절>에서 벤야민은 꿈을 꾸듯 그의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그렇게 꿈을 꿀 수는 있지만 아무리 해도 가질 수 없는 상실된 것들이 있기에, 이 회상에는 상실된 것, 잃어버린 것에 대한 멜랑코리적 동경이 자리잡고 있다. 그 동경의 출발점에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베를린이 있다. 행복하게도 나는, 회상의 장소로서의 베를린을 벤야민과 공유하고 있다. 벤야민에게 도심 한 가운데서 길을 잃고 헤매는 법을 가르쳐 준 티어가르텐에서 나는 내 아이들과 함께 놀이터를 순례하였고, 그에게 미래가 오래된 과거처럼 느껴지게 하던 베를린 동물원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빨며 물개와 백곰을 구경하였다. 어린 벤야민이 무거운 철제 회전문을 밀며 들어서던 도서관에서 나는 주말마다 아이들의 동화책과 노래 테이프를 대출하였고, 화려한 깃을 펴고 돌아다니던 공작들이 벤야민을 좌절시켰던 공작섬은 아이들과 함께 바지선에 자전거를 싣고 건너가 거닐어 본 곳이기도 하다. 지각생 벤야민이 불안으로 가슴 졸이며 통과해 들어간 학교 교문 위를 나는 매일 S-Bahn을 타고 통학하였고, 끔찍하게 싫어하던 수영 교습을 마친 소년 벤야민이 잡화점 창 유리를 들여다보며 지나던 쿠르메 거리에서는 케밥을 사먹었으며, 그가 큰 용기를 모아 윤락녀에게 말을 걸었던 루터 거리에서는, 매년 나붙던 포르노 박람회 ‘비너스’의 선전 포스터를 훔쳐 보았다. 적어도 1주일에 서너 번씩 나는 100번 시내버스의 어지럽게 긁힌 창문 너머로, 어린 벤야민이 기둥을 둘러싼 황금색 대포의 유래를 궁금해 하던 승리탑을 건너다 보았고, 토요일 저녁 할인슈퍼에서 다음 주 치 식료품을 사서 돌아오면서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준 행복감에 젖은 아이 벤야민이 바라보던 초저녁 가스등의 불빛을 쬐었다. 베를린 동물원 역 건너편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터에서는, 겨울 아침 벤야민을 깨우던 익어가던 사과 냄새를 맡았고, 벤야민을 매료시켰던 카이저파노라마 앞에 앉아서는 땡 소리와 함께 다음으로 넘어가는 향수를 불러내는 오래된 사진들을 들여다 보았다. 한마디로 벤야민의 회상이 펼쳐지는 베를린이라는 장소와 그 곳의 사물들은, 8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 곳에 살면서 내가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았던 바로 그것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벤야민의 이 글은 내게는 다른 누구의 어떤 글보다 특별하다. 어린 벤야민이 베를린에 살았던 시기와 나의 베를린 유학시절은 거의 100 년이라는 시차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 두 시간은 베를린이라는 장소와 그 곳의 사물들을 매개로 겹친다. 그렇기에 이 글을 읽으면서, 기억을 뒤져 자글 자글한 과거의 파편들을 끄집어내는 벤야민의 섬세한 손놀림을 따라 가면서 나는 바로 그 장소, 그 사물들에 얽혀있는 나 자신의 회상에로 빠져든다.


어떤 경우 회상은 치명적 자기 탐닉일 수 있다. 그것이 치명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때 우리의 시선이 온통, 과거가 묻혀있는 자신의 기억에로만,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만 향해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 성격을 갖는 그러한 회상이나 회고 속에서 타인들은 나의 욕망과 결핍에 의해 채색되고, 단죄되며 부인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회고록이나 회상록이라는 글쓰기를 근본적으로 불신한다. 얼마 전 피델 카스트로의 인터뷰나 최근 신정아의 회고록이 보여주듯, 회상되는 과거에 연루되어 있던 타인들의 삶과 진정성은 회상하는 자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시선에 따라 재단된다.) 하지만 벤야민의 글은 이러한 회상의 주관주의적 폭력성에서 벗어나 있다. 그 이유는 그의 회상이 사람보다는 장소와 사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여러 사람들 - 레만 이모, 외할머니, 헬레나 푸팔 선생님, 크노흐 선생님, 루이제 폰 란다우, 아버지, 어머니 - 이 언급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살던 혹은 벤야민이 그들을 접했던 장소나 사물과 결합되어 ‘장소화’ 또는 ‘사물화’되어 있어, 승리탑, 티어가르텐, 글자상자, 전화기와 같은 방식으로 회상된다. 장소나 물건을 증오하거나 미워할 수 없듯이, 장소나 물건에 한을 품거나 복수할 수 없듯이, 이들은 벤야민의 사적 감정의 맥락에서 단죄되거나 이상화되는 대신 관련된 체험들을 상기시키는 탈 주관적 매개들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회상이 사적이지만 또한 전적으로 사적이지만은 않은, 1900년 경 베를린이라는 장소와 사물들의 위상학을 함께 펼쳐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