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벤야민의 <유년시절>을 중심으로 베를린의 장소와 물건들에 연루된 나의 기억들을 이야기하려는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하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유년시절>에 대한 해제의 형식을 띨 것이지만 여기서 해제란 텍스트를 서지학적으로, 해석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린 시절 벤야민의 삶이 이루어졌던 장소와 물건들의 의미를, 벤야민이 그를 접하게 된 맥락 속에서 서술한다는 의미이다. 벤야민의 삶은 연대기적이 아니라, 그가 보고, 방문했던 장소, 그가 체험했던 사물들을 매개로 이야기될 것이다. 여기에 그 장소와 사물들을 매개로 겹쳐있는 나 자신의 체험들이 엮어져 들어갈 것이다. 벤야민의 회상의 축에 나 자신의 회상의 축을 함께 짜 넣음으로서 내가 의도하는 것은, 벤야민이 살았던 1900년 경 베를린과 내가 살았던 2000년 경의 베를린을 연결 시켜보려는 것이다. 벤야민이 체험했던 장소와 사물 중 많은 것들은 이후 없어지거나, 다른 이름 혹은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다. 벤야민의 <어린시절>은 어린 벤야민이 보고 체험했던 장소나 사물들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그로부터 100년 후의 베를린(에)을 살았던 나는 그 100년이라는 시간이 남겨놓은 이 흔적과 변화들을 보았다. 베를린은 그 사이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겪었고, 나치 독일의 수도가 되기도 했으며, 동 베를린과 서 베를린으로 분단되었다가, 1990년에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거대한 격변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내가 살았던 2000년 경 베를린의 많은 장소와 사물들에 그 흔적을 남겨놓았고, 내 삶은 바로 그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민감한 독자들이라면 이 겹쳐진 회상의 작업 속에서 광폭한 1세기 동안 베를린에서 일어난 변화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베를린의 역사, 사회적 변화들을 열거하는 사회학적 도큐멘트가 되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미 벤야민의 <유년시절>부터가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 <유년시절>에서 베를린의 장소와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회학자의 객관적이고 분석적 시각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그것이다. 그렇기에 장소와 사물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낯설고도 진귀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이는 어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익숙해 있던 것을 처음으로 보고, 듣고, 만지면서 만나기 때문이다. 어른에게라면 의미만 전달하고선 사라져 버릴 단어들은, 아이에게는 손으로 붙잡고 이리저리 짜 맞추는 촉각적 물건이 되며, "레에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화 속 ‘이모 Muhme’는, 그 단어에 무지한 아이에게는 온 몸을 무엇인가로 감싸고 있는 “무메레엘렌 Mummerehlen"이라는 괴물이 된다. 아이는 서랍 속에 동그랗게 말려 보관된 양말을 그 속에 손을 집어넣고 조물락거리는 장난감으로 만나고, 거리에서 절반쯤 창문이 내려다보이는 반지하 상점은, 뾰족 모자를 쓴 요정들이 있는 어두운 동굴이 된다. 이렇게 아이의 시점은 익숙하고 진부해진 장소나 사물들을 호기심과 불안, 기대와 감각적 즐거움을 주는 낯선 대상으로 만들며,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하여 보듯” 그로부터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어낼 수 있게 한다.
베를린의 장소와 사물들을 낯설게, 그래서 새롭게 보게하는 이러한 아이의 시점에 상응하는 것이 그 곳에서의 나의 사회적, 존재론적 위치였다. 벤야민이 어른들의 세계의 이방인인 아이의 시선을 자신의 관점으로 삼았다면, 나의 그것은, 베를린을 그 곳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방문했다 다시 떠나는’ 이방인(게오르그 짐멜)으로 체험했던 나의 지위로 부터 나왔다. 각종 증빙서류와 문서들을 구비해 그 곳에서의 나의 현존을 정기적으로 연장 받아야 했던 외국인으로서, 몸이 아파 찾아간 병원에서 내 몸의 고통 - 사적언어! - 을 그 고통에는 도무지 낯설기만한 언어로 표현해야 했던 비 토착인으로서의 나의 존재는 이미 그 장소와 사물에 대한 내면적 거리감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방인이라는 이런 지위는 자칫 자신이 살았던 곳에 대한 반감으로, 심하면 그에 대한 폐쇄적 적대감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 만일 그러했다면 베를린에 대한 벤야민의 회상을 읽으며 그에 대한 나 자신의 회상에 잠기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방인으로서의 낯설음을 상쇄시켜 준 중요한 내 삶의 조건 덕분이다. 그건 베를린에서의 내 삶이 나의 아이들과 함께였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그 곳의 장소와 사물에 대한 나의 회상에 늘 함께 출현하는 주요 등장인물일 뿐만 아니라, 내가 그 장소와 사물에 더 깊이 다가가게 했던 훌륭한 인도자였다. 벤야민이 말하듯 아이는 살아있는 자들은 물론 심지어 죽은 자들에게까지도 선뜻 연대를 할 수 있을 만큼 선입견 없는 존재다. 그 덕분에 나는 독일 아이들과 함께 놀며 그들만의 은어를 배울 수 있었고, 그 아이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거나 초대받을 수도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나는 학급회의에서 선생님, 다른 부모들과 고민을 나누었고, 축제나 바자회를 준비하면서 그들의 일상적 삶에 연루될 수 있었다. 벤야민의 글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몇 가지 체험, 예를들어 독일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어떤 심리적 의미를 갖는지,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들이 부활절 달걀을 찾을 때는 어떻게 ‘엔지니어’로 변신하는지, 독일 아이들에게 말의 음성적 울림이 의미보다 더 깊은 영향을 끼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도, 나와 함께 그 곳에서 살았던 내 아이들이 나로 하여금 그 곳의 전통과 삶 속으로의 출입구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여름이면 자전거 바퀴가 땅을 밟는 자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슈프리 강변을 함께 달리고, 샬로텐부르크 성 뒷 편 넓은 호수에서 날아드는 오리와 백조(!)에게 함께 빵 조각을 나누어주던 나의 두 아이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