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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정 May 18. 2024

나의 열한 살과 서른 살

나의 11살, 친척오빠의 20살, 그리고 30살의 나

내가 11살 때 제일 큰 친척오빠는 성인이 됐다. 정장, 염색, 소주, 운전. 내게 인상 깊게 남은 친척오빠의 ‘첫 성인’ 키워드다. 무엇보다 오빠를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흔쾌히 차키를 맡기는가 하면, 술 한 번 받아보라며 신나하는 얼굴들. 오빠가 정말로 어른 같았고 꽤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의 나는 정장, 염색, 소주, 운전 이 네 가지를 다 싫어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때를 알고 내색 없이 기꺼이 해내고 있다.


11살 나의 에버랜드, 30살 나의 에버랜드와 아빠

11살 때, 친구들끼리 에버랜드에 갈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용인 어린이들로 이미 에버랜드를 수도 없이 다녀 에버랜드 지리쯤은 줄줄 외고 있었고, 내 친구 슬기는 휴대폰도 있었다. 이 야심 찬 계획을 아빠에게 말했지만 아빠는 단호하게 불허했다. 결국 나만 에버랜드를 못 갔고 나는 그날 내내 울며 불며 골을 냈다.


어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에버랜드 장미축제도 보고 싶고 푸바오 동생들도 보고 싶은데 요즘은 어떻게 예매를 하냐고 물으신다.

예매야 해드릴 수 있지만 판다월드는 어플로 스마트줄서기를 해야 입장이 가능한데 과연 아빠가 어플 설치부터 예약, 입장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내가 11살 때 아빠처럼 아빠를 못 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나름의 묘책으로 동생이 영상통화로 설명해 가며 아빠를 거의 원격 조정한 결과 아빠 휴대폰에 어플 설치, 예약까지 성공했다.


11살과 30살의 한강 유람선

11살 때 한강 유람선을 탔다. 타자마자 유람선 데코레이션의 빛들이 내 혼을 쏙 빼앗았다. 유람선 안에서 판매하고 있는 열쇠고리들마저 너무 근사해 보였다. 유람선에서 보는 한강의 야경은 난생처음 보는 장면이었고 말 그대로 아름다웠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어제 타고 온 것 같다.


마침 어제 한강에 갔다. 친구랑 한강을 걷다가 물었다. “유람선 타봤어요?” “아니, 타봤어요?” 난 타봤는데 정말 정말 예쁘고 근사하다고 꼭 타보라고 말하다 말고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아, 근데 그게 거의 20년 전이긴 해.”



19년 새 변한 것들

분명 같은 것들인데 19년이 흐른 지금의 나에겐 11살에 내가 느낀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다. 성인의 상징 같아서 동경했던 것들이 이제는 해야만 하는 것들이 됐다. 나를 어른없이 에버랜드에 보낼 수 없었던 아빠는 내 도움 없이 에버랜드를 갈 수 없게 됐다. 아름다웠던 유람선은 이제 초파리떼의 습격과 추운 강바람부터 예상하게 한다.


11살의 내가 보고 겪은 일인데 30살 나에겐 완전히 다른 경험이 되고 있다. 이제는 같은 일이 아닌 것이다. 같은 소주라도 11살 내게, 지금 내게 주는 인상이 이렇게나 다른데 같은 일이라 할 수 없겠지.


이렇게 하나의 요소를 다르게 경험하고 해석하게 되는 동안 19년이 흘렀다. 어느새 나이 앞자리가 두 번이나 바꼈다(한국 나이로).

11살 때 일이 이렇게나 옛날 일 같지 않은데 흐른 시간을 셈하다 보면 세월이 야속하다는 어른들 말씀이 떠오른다.


그런데 나이 먹는 게 마냥 싫냐고 하면은 그렇지도 않다. 오늘 갑자기, 어쩌면 나이 먹는 거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앞자리가 바뀌는 날이 기대되기도 하다.



사실 그 얘기를 쓰고 싶어서 11살의 이야기들을 썼다. 11살에 느낀 것을 30살에 다시 기억할 때 몰려오는 이 격세지감. 그리고 30살이 되어서야 느끼게 되는 것들. 이 이야기를 차차 쓰고 싶어서 11살 때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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