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독오독 Mar 30. 2024

얄미운 순이

 내게는 다섯 살 동네 친구가 있다. 그 친구 이름은 순이이다. 우리가 친구가 된 계기는 순이의 유별난 성격 때문이었다. 평소 매우 예의 바르고 점잖은 그녀는 엄마가 외출만 하면 똥고집쟁이가 되었다. 엄마가 올 때까지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화장실도 참았다. 할머니가 혼도 내고, 달래도 보지만 소용없었다. 현관 앞에 널브러져 문밖에 나는 소리만 듣고 있으니 외출한 엄마 마음은 어땠을까.     

 이러한 까닭으로 순이가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모두의 정신 건강을 위한 별장. 순이 엄마와 나는 이 계획을 성공시키려고 일부러 집 말고 아파트 정문에서 만난다.

 "저기 언니 있네!"

 순이는 곧 일어날 배신을 예상하지 못한 채 반갑게 뛰어온다. 나는 가방에서 순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꺼낸다. 그리고 그녀의 관심이 바나나에 쏠린 순간 순이 엄마는 주차장으로 사라진다. 나름 치밀한 작전. 하지만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순이가 엄마 뒷모습을 보고 우는 날이면, 나는 내가 유괴범이 된 거 같아 굉장히 민망하다.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이 상황을 설명하고 싶다.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그나마 다행인 건 순이의 난동이 길지 않다.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녀는 체념하고 나를 따라온다. 왜냐하면 바람 쐬러 갈 걸 아니까. 순이는 엄마의 외출과 산책 사이의 관련성을 파악했다.     

 그녀의 산책은 꽤 역동적이다. 나무, 바위, 계단, 흙, 풀 등 온갖 냄새를 다 맡으며 걷는다. 공원에 도착하면 잔디밭에 등 비비고, 구르고, 날아가는 나뭇잎이라도 보면 잡겠다고 트리플 악셀까지 뛴다. 입으로 그게 잡히겠냐. 순이 얼굴에 지푸라기가 잔뜩 묻었다. 고실고실한 하얀 털옷도 노랗게 변했다.


 기분이 좋아진 순이는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거실에 누워 쿨쿨 잠을 잔다. 좋은 꿈 꾸렴. 일어나면 또 서러울 거니 저녁 7시에 깨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순이는 그보다 일찍 일어나 신발장 앞에서 나를 째려본다. 아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공놀이로 꾀어봐도 두어 번 물어오다 다시 눈으로 욕한다. 아니 저 초코볼 같은 눈을 저렇게 치켜뜬다고? 고구마를 구워주니 얌얌 먹고 나서 다시 현관문만 보고 있다. 순아, 포기해.          

  순이가 시계를 볼 줄 알았으면 좋겠다.

  “저 짧은바늘이 7, 긴바늘이 12를 가리키면 엄마가 올 거야.”

 아, 바늘이 뭔지부터 가르쳐야 하나? 숫자 구분할 수 있을까? 위치로 익혀야 하나? 그런데 시계를 읽을 수 있다 쳐도 그 시각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모르면 시계만 보고 앉아있을 텐데. 시계로는 순이를 설득할 수 없을 듯하다.          

 드디어 약속의 시간이 되었다.

 “곰순아, 엄마 마중 갈까?”

 리드줄을 들자 순이는 잔뜩 신이 난다. 배신감. 너 이러기냐. 나랑 한 시간 넘게 산책도 하고, 내가 널 위해 고구마까지 구웠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줄은 내가 잡고 있지만, 앞장은 순이가 선다. 엄마가 보이자 뒤도 안 보고 뛰어가는 순이. 얄밉다. 하지만 너무나 귀엽다. 잘 가!



그림: Grandma Moses, <The Gate>



작가의 이전글 분홍빛 눈이 내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