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유지 #기적질문 #우울증
'마음의 감기, 우울증‘
J는 그 말이 싫었다. 이건 감기가 아니다. 감기처럼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야. 증상이 좀 괜찮아질 수는 있어도 일시적일 뿐. 항상 내 안에 있고, 일부 빠져나갔다가도 다시 회복되는. 굳이 비유하자면 혈액과 같은 거다. J는 그녀가 단 한 번도 완전하게 벗어나 본 적 없는 우울이 감기라 불리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그깟 감기도 낫지 못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자신을 비웃는다고요? 난 내가 싫은 적은 있어도 내가 나를 비웃은 적은 없는데."
P가 들고 있던 포크와 스푼을 파스타 접시 끝에 내려놓는다.
"꼴좋다라고도 해요. 내 팔자 내가 꼬았지. 꼴좋다."
"J.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영화 <스토커> 봤어요?"
"그 박찬욱?"
"네, 그 영화에 꽃이 자기 색을 고를 수 없듯, 내가 무엇이 되건 내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 나와요. 지금 내가 나의 선택과 의지로만 이렇게 된 건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죄책감이 좀 줄어드는데. 한편으로 또 그냥 모든 게 내 탓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만 정리 되면 다 깔끔하게 해결되는 문제."
"오늘 상담 가서 무슨 일 있었어요?"
"맥빠졌어요. 교수님께서 비밀 유지를 파기할 수 있는 경우를 말씀해 주셨는데 내담자가 자신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가족한테 알린대요. 그러면 죽고 싶을 때, 죽고 싶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죽고 싶다고 말한다고 파기하는 건 아니고, 실제로 자살 시도하려는 낌새가 있을 때 파기할 거예요."
"네, 그런데 신경 쓰이더라고요. 차라리 직장이나 자선단체에 연락하지. 여기 채소 잘 굽네요. 라구랑 잘 어울려요. 먹어볼래요?"
J는 가지를 잘라 P의 접시에 놓는다. 절반 짜리 대화. 말로 이 갑갑한 기분을 잘 설명할 수가 없는데, 그 기분을 P가 잘못 이해하거나 가볍게 생각하면 짜증이 날 거 같아 그녀는 화제를 돌린다.
"오늘 밤 잠을 자는 사이에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그동안 고민했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이요. 그런데 P는 잠을 자고 있어서 그 사실을 몰라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모습을 보면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게 될까요?"
"갑자기? 흐음. 휴대폰이요. 아침에 휴대폰 알람이 안 울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출근을 안 해도 되어서 알람을 맞춰놓지 않은 것이지요."
"일이 많이 힘들어요?"
"그건 아닌데 그냥 취미처럼 하고 싶을 때만 나가서 일하고 싶어요. 그리고 커피 향. 먼저 일어난 아내가 커피를 내리고 있어요."
"밤사이에 결혼까지 했어요? 누구랑요?"
"그건 비밀입니다. J는요?"
"거실에서 가족들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요. 엄마, 아빠, 언니가 소파에 각자 편한 자세로 늘어져 있어요. 프로그램이 별로 재미없는지 과일 먹고, 딴 얘기하고. 나도 소파 옆에 가서 앉아요. 아무 긴장감 없이 편안해요."
"TV 본다고요? 겨우 그거예요?"
"좋은 TV 살까요?"
그녀에게 기적이란 일어난 적 없는 일. 그리고 일어날 수 없는 일. P는 나를 걱정하지만 나를 온전히 담을 수는 없을 거다.
"오늘 회사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가요!"
J는 지하철 승차장으로 올라간다. 스크린도어에 얼굴이 일그러진 여자가 있다.
'뭘 기대한 거야.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안전지대가 생길 줄 알았어? 남들처럼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을 거라 착각한 거야? 어리석어. 이 병은 감기 아냐. 한동안 아프고 낫는 감기가 아니라고.'
잠시 특별한 일이 생기면 더 좋아질 거라 기대하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지금처럼 증상이 나빠질 때도 마찬가지다.
"자살할 마음이 있는 건가요?"
"교수님, 저 안 죽어요. 제가 알아요."
수차례 검증한 신념. 유리에 비친 저 여자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자고 나면, 괜찮지 않지만 늘 그래왔던 상태로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J. 네가 확신하는 그 믿음이 깨져버렸어. 네가 잠든 사이 기적이 일어났거든. 깊은 잠을 자느라 넌 아직 이 사실을 몰라. 이제 곧 아침이야. 넌 무엇을 보고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게 될까?
감기가 나을지 몰라.
* '기적질문(miracle question)'은 해결중심단기치료 기법으로 문제 자체를 제거시키거나 감소시키지 않고 문제와 떨어져서 해결책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통해 치료자는 내담자가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을 스스로 설명하게 하여 문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해결 중심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 상담에서 '비밀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사적 문제를 지켜줄 책임이 있다. 하지만 상담자가 비밀유지를 파기할 수 있는 예외의 경우가 있다. 첫째, 내담자가 자신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경우, 둘째, 내담자가 타인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셋째, 아동학대와 관련된 경우이다.
* 참고문헌/강연/영화
- 노안영(2011), 상담심리학의 이론과 실제
- 정문자, 정혜정(2015), 가족치료의 이해
- 이서현, 우울증 관리하며 살아갑니다 https://youtu.be/EOzlI9HTHZk?feature=shared
- 박찬욱(2013), 스토커
난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이뤄지지 않았어.
어머니 블라우스 위로 아버지 벨트를 맺고 삼촌에게서 받은 구두를 신었거든.
이게 나야.
꽃이 자기 색을 고를 수 없듯 내가 무엇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그걸 깨달아야 자유로워지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야.
* 그림: Vincent van Gogh, <Sprig of Flowering Almond in a G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