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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Vol 3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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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콰드로페니아 Mar 04. 2021

잃어버린 집

영재 .


초등학생 최영재는 학교를 마치고 운동장 앞 화단에 앉아 신발끈을 조여 묶었다. 이 작은 의식은 집으로 가는 짧은 여정의 시작을 의미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서 삼십분 남짓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먼거리는 아니지만, 어린 아이의 작은 보폭으로는 발을 바삐 움직여야 하는 거리였다. 평소에는 엄마가 차로 태워다 주셔서 편히 하교를 했었다. 하지만 엄마가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시면서부터 걸어서 집에 가는 것 외에 다른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출발 전 얕은 호흡을 한 번 내뱉고 초등학생 최영재는 교문을 나섰다.


집까지의 여정은 꽤나 다채로웠다. 우선 학교 앞에서 커다란 논을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물론 큰 길을 따라서 걸어갈 수도 있지만 꽤나 돌아 걸어야만 했다. 오래 걷기 싫어하는 나와 친구들은 전부 논을 가로지르는 길을 택했다. 논 옆의 길은 작은 트랙터 한 대가 딱 맞춰 지나갈 정도의 폭으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논 옆이라 그런지 유난히 벌레가 많았다. 자칫하면 입에 날파리가 들어오기 일쑤였기에 날파리가 보인다 싶으면 입을 다물고 숨을 꾹 참았다. 소문에 따르면 같은 학년 누군가는 길에서 뱀을 보았다고도 했다. 겁이 많은 나는 혹시라도 뱀이 나올까 기다란 나뭇가지로 길 주변을 툭툭 건드리며 길을 지나곤 했다. 물론 그 길에서 실제로 뱀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내화 가방을 연신 발로 툭툭 차대며 걷다 보면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길은 금새 끝이 났다. 


논을 가로지르는 길이 끝나면 차도를 따라 좁은 인도가 쭉 이어졌다. 길이 좁아서 누군가가 반대쪽에서 걸어오고 있다면 한쪽에 바짝 붙어 길을 터주어야만 했다. 찻길을 따라 늘어진 그 길은 하굣길에서 가장 지루한 구간이었다. 길 가다 멈추어 구경할 벌레도 없었고 논 옆의 길처럼 뱀이 나올까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한 여름에 그 길을 걸어갈 때면 유난히 힘이 빠졌다. 


한번은 친구와 함께 걷다, 날이 너무 더워 장난삼아 히치하이킹을 한 적도 있었다. 조그만 게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차도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따금씩 우리를 아시는 분들(이를 테면 다른 친구의 부모님)이 우리를 발견하시면 집 근처까지 태워다주시곤 했다. 엄마가 아셨다면 길길이 화를 내셨겠지만, 그때의 나는 미국 로드 무비의 주인공이 된 기분에 뿌듯했다. 


지루한 길은 자연스럽게 내가 사는 단지가 있는 동네로 이어진다. 당시에는 편의점도 없었고 이렇다 할 가게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길 주변의 가게에 갈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들리는 가게는 유리문 손잡이 위에 ‘댕겨유’라고 안내 문구가 붙어있는 슈퍼 뿐이었다. 댕겨유 슈퍼에서 더위사냥을 사면, 집에 도착할 즈음에 맞춰 다 먹을 수가 있었다.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슈퍼 옆의 라이프 아파트를 앞을 지나면, 인도가 끊겨 차도를 따라 걸어야 했다. 널찍한 길이라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다. 슈퍼에서 산 간식도 있었고, 이제 집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을 걸을 때는 힘이 바짝 났다. 


우리집이 있는 주택 단지는 언제나 조용했다. 하지만 내가 집으로 걸어갈 때면 동네 개들이 죄다 짖어대는 탓에 내가 주변의 평화를 깨뜨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걸음을 더 빨리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눈에 들어오면 짧은 여정이 마침내 끝이 났다. 초등학생 최영재는 아이스크림 쓰레기를 한 손에 꽉 쥐고 대문을 열어젖힌다. 빨리 들어가서 시원한 쥬스를 마시며 투니버스를 볼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대문에서 현관문까지의 그 짧은 거리를 걷는 와중에,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현관문 열쇠를 챙겼었나?’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평소 집 열쇠에 열쇠고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녔는데, 오늘은 하루종일 주머니가 가벼웠다. 아차 싶었다. 


침착하게 베란다 문과 내 방 창문이 열려있나 확인했다. 열쇠를 두고 올 때면 종종 창을 열고 집에 들어가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몸집이 작은 초등학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집의 창이란 창은 그날따라 전부 꽉 닫혀 있었다. 집을 반복해서 돌며 열린 창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다를 건 없었다. 이럴 수가. 눈앞이 캄캄했다. 엄마는 항상 아빠보다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오시지만 저녁까지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핸드폰은 당연히 없었고, 주변에 공중전화도 없어서 엄마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집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니 답답했다. 무엇보다 당장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어린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 집이 아닌 낯선 사람의 집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집에 들어가지 못했을 뿐인데 집을 잃은 것 같다니. 순진무구했던 초등학생인 나에게는 정말로 큰 사건이었다. 자칫하면 눈물이 쏟아져 내릴지도 몰랐다. 


어딜 가야할지 전전긍긍하던 와중에 저번 주에 들렀던 친구의 집이 떠올랐다. 친구는 아까 아이스크림을 쥐고 지나왔던 라이프 아파트에 살았다. 오늘 학교에서도 봤었고 친구가 학원을 가는 날 또한 아님을 알고 있었다. 친구는 분명 집에 있을 터였다. 친구 집에서 조금 놀다 보면, 엄마의 퇴근 시간과 얼추 비슷할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현관문 앞에 내려두고 힘들게 걸어온 길을 되돌아 나가기로 결심했다.


친구 집을 향해 걸어갈 때, 아까 나를 향해 짖던 개들이 또 한 번 동네가 떠나가라 짖어댔다. 마음이 움츠러 들었지만 이번에는 구태여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올 때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괜히 더 뭉그적뭉그적하며 걸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때우려는 속셈이었다. 친구의 집은 저번 주에 들렀던 곳이라 층과 호수까지 정확하게 기억났다. 낮은 층수라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이용했다. 복도를 따라 똑같은 현관문들이 줄지어 있었다. 친구 집이 가까워질수록 친구 집 현관에 붙어있는 무언가가 점점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친구 집 현관에는 친구 어머니가 친구에게 써놓은 쪽지 하나가 있었다. ‘오늘 엄마가 일이 있어 늦으니까, XX 이모 집에 가 있어’ 쪽지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그 이모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친구가 여기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걸었던 걸까.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집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터벅터벅. 힘이 닿는 대로 느리게. 문 앞에서 힘없이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최대한 빠르게 뛰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최대한 느리게 걸으려고 노력한 적은 처음이었다. 길을 몇 번이고 오간 탓인지 시끄럽게 짖던 마을의 개들은 더 이상 나를 향해 짖지도 않았다. 현관 앞에 내려둔 가방이 유난히 작아보였다. 가방에 등을 기대고 현관 앞에 철퍼덕 주저 앉았다. 엉덩이에 묻을 먼지는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엄마가 올 때까지 뭘 하지?’ 괜히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찬찬히 마당을 둘러보았다. 푸른 잔디, 늘어진 잎사귀들과 축축한 흙. 밝은 꽃들이 듬뿍 담긴 화분들까지. ‘화분?!’


벌떡 일어나 베란다 옆의 화분을 살짝 들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화분 밑에는 현관문 여분 키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집으로 오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과정이 얼마나 쓸데 없었는지는 전혀 상관없었다. 나는 이제 집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똑같은 문을 여는 열쇠였지만 내 손에 익숙치 않아 질감이 낯설었다. 열쇠를 돌리자 그토록 힘껏 닫혀 있던 문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틈을 내주었다. 들어갈 수 없던 집에 드디어 발을 들였다. 집은 그대로 있었지만 집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후에도 나는 종종 집 열쇠를 잊고 다녔다. 하지만 그때처럼 집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열쇠가 필요 없는 비밀번호 도어락이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리집 현관에도 도어락이 달렸다. 이제는 열쇠를 잊어 문 앞에서 전전긍긍할 일이 없었다. 더이상 집을 잃을 일도 없었다. 든든할 정도로 꽉 잠긴 나의 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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