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콰드로페니아 Apr 05. 2021

안부인사

승준.

어떤 물건이든 어렵지 않게 장난감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장난감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런 사람이 많았다. 친구의 얼굴을 갖고 놀린다거나 교묘하게 이간질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갖고 노는 사람들. 장난감으로 삼아서 안 되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들에게는 이런 장난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사람은 장난감이 아니다. 타인의 장난감이 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은 관계에서는 쉽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의 감정소비용 장난감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타인이 나로 인해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은 완결된 네이버 웹툰 'Ho!'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작중 인물은 '자네는 사람이 자위도구인가?' 하고 묻는다.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성적인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았다. 나의 편의만을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했다. 전반적으로 적극적이지 못하지만 간결한 인간관계를 꾸려나가는 내 모습에 비추어보면, 나의 진중하지 못한 태도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오히려 사람과 사람의 틈에서 멀어지고 나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자가당착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고민은 과거부터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싫은 말도 잘 못하고 거절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성격 탓에 놀림도 많이 받았다. 내 몸에 털이 많다는 이유로 나를 장난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는데 '장난이겠거니.' 받아치면서 속앓이를 심하게 했었다. 대학에 와서는 학점이 잘 나오니 자료를 얻기 위해 연락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빠짐없이 내 자료들을 줬다. 두 번 정도의 예외가 있었다. 이미 누군가에게 줬던 자료라서 줄 수가 없었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자료를 요구해서 줄 수 없었다. 나중에는 누가 물어보기 전에 먼저 줘버리기도 했다. 당신의 필요에 휘둘리기 싫었던 마음과 '이깟 자료 누구한테 주든 상관없겠지.' 하는 체념이 같이 섞여있었다. 타인의 필요에 휘둘리는 나와 나 자신의 체념 사이에는 분명 '이 자료를 주면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는 기대가 있었다. 짧은 감사를 받고 나서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과 동시에 ‘그럴 것 같더라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난 인간관계에 정말 어수룩하다. 아무도 나를 친구로 여기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다. 어쩌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고 떨쳐내기도 어렵다. 어느 공간에서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 공간 밖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학교에서 만나던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서만 유지되었다. 가볍고 자유로웠다. 뒤따라오는 허무함과는 별개로 그런 관계는 편했다. 누군가가 나를 찾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먼저 찾지 않았으니까.' 하는 웅얼거림을 내뱉으면서 나도 찾지 않았다. 거만한 태도지만 이런 내 모습이 거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 25년이나 걸렸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야하고 더 잘해야 하는 게 옳다. 이제 그들은 만날 때만 만날 수 있는 꿈같은 사람들이 되었다. 만남의 때는 과거에 온점처럼 찍혀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빠짐없이 좋아했다. 그러나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에 극심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나를 부르기나 하겠어?' 라는 자기비하는 내가 그들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한편, 이런 식의 자기비하는 ‘누군가 부르면 싫더라도 나갈 거야!’ 라는 태도를 깔고 있었다. 그랬던 적도 꽤 많았다.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술자리, 불필요한 만남에도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움직이기도 했다. 나는 기꺼이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어서라도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던걸까? 자기비하의 끝에서는 늘 인간관계의 오묘한 저울질이 휘청거렸다.

내 관계 속에서 나와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 이유는 매번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잠깐이라도 내가 그들을 내 필요의 잣대 위에서 저울질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먼저 부를 염치가 없었기 때문인 걸까. 친구의 얼굴을 놀리던 양아치나 이간질 하는 비열한 누군가와 다를 바 없이, 내 주변 사람들을 한때 나의 감정을 위로해줄 도구처럼 여겼던 건 아닐까. 지금 남아있는 내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나의 최선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애정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너무나 벅찬 복이다.

대부분의 반성은 늦어도 의미가 있는데 관계에 대한 반성은 늦으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 것 같다. 좋아하는 그들과 더 친하게 지내지 못했던 내 모자람이 나의 자가당착이었다. 친한 친구 영준이가 새벽에 전화를 걸었다.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목소리에는 술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잘 지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준이가 내게 보여주던 인간관계는 이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너처럼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영준이는 고맙다고 말했고 사적인 이야기가 더 오갔다. 전화를 끊고 영준이가 아닌 다른 친구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 걸까. 안부인사를 묻는 것으로 나는 이전보다 더 진심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나 스스로가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지 않고, 나도 누군가를 장난감으로 삼지 않을 수 있는 순수한 관계에 대해선 회의감이 들었다. 전인류적 사랑이라는 단어라도 써야 하나. 내가 쓰기에는 너무나 거창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필요가 섞이지 않은 관계가 어딨느냐고 나 스스로에게 따져본다. ‘마냥 그렇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라는 식의 심심한 대답만 남아서 계속해서 머리를 싸고돌았다. 필요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관계, 아무도 장난감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관계는 가능한걸까.



승준.






콰드로페니아는 메일링 서비스로 글을 전달합니다. 첨부된 링크를 통해 구독신청을 해주시면 매주 화요일 아침 10시에 여러분의 메일함으로 글을 보내드립니다. 완벽하게 좋은 글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한 주에 한 번 적당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글을 보내 드릴게요.


저희는 반복되는 일상을 다른 관점으로 그려 내고자 합니다.

저희의 글이 일상에 작은 차이와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quadrophenia_official/

구독 신청 https://mailchi.mp/1cb3d1a5e1ad/quadro


매거진의 이전글 vol 4. 장난감 -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