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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Vol 9 Os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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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콰드로페니아 Sep 19. 2022

아이돌 음반 찾아 삼만리

여행은 늘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흐른다. 집으로부터 벗어난 이상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생긴 문제로 세워둔 계획이 망가지기도 한다. 한편 여행지에서 마주한 새로운 공간과 사람을 보며 기존의 계획을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바꿀 때도 있다.


16년 여름 혼자서 부산으로 5박 6일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원래는 송정해수욕장에 도착하여 서핑을 배우는 것이 여행 후반부의 계획이었다. 기왕 여행을 떠난 김에 이전에 못 느껴본 색다른 경험을 해보고자 했다. 부산 여행 치고 긴 기간을 잡은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서핑은 맛도 보지 못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의 팬사인회 소식을 들었다. 시계추를 그때로 돌린다면 아마 결코 하지 않을 선택이었겠지만 나는 정신이 나갔던 모양인지 서핑을 위해서 모아둔 돈 중 10만 원을 꺼내서 팬사인회에 응모하는 이상한 결정을 했다. 당첨이 되었다면 그나마 위안이라도 되었겠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고 그렇게 허공에 돈을 날리고 말았다. 내게 남은 것은 알고 지내던 덕후 친구와 먹은 점심 한 끼뿐이었다. 결국 부산 여행의 후반부는 송정해수욕장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며 했던 밤 산책과 숙소에서 시간을 녹이기 위해서 본 ‘나 혼자 산다’만 남았다. 그 사건은 내가 한동안 아이돌 덕질을 접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부산에서의 그 일 이후로 나는 아이돌을 격렬한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덕후들 사이의 유명한 격언(?)처럼 나는 또다시 아이돌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이달의 소녀였다. 기존의 아이돌 그룹이 추구하지 않던 음악을 표현하는 독특한 모습에 ‘이것이 미래의 아이돌이다’라고 찬양하며 흠뻑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 기대를 충족시키는 훌륭한 음악 수준에 내 덕심은 날이 다르게 차올랐다.


실제로 이달의 소녀의 음악은 해외 평론에서 소개될 만큼 꽤나 좋은 평가를 받았다. 나름의 세계관을 구성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이야깃거리도 만들고 있었다. 새로운 아이돌을 찾던 사람들과 신선한 음악을 찾던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회자되면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흐름이 생길 초창기부터 이달의 소녀에 손을 댔다. 공개 방송에 가서 구경하기도 하고 구하기 힘들다는 한정판 음반을 구하러 서울의 대형 서점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아는 사람만 아는 줄 알았던 이달의 소녀는 나름의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고 구하기 쉬웠던 음반은 서서히 동이 나기 시작했다. 팬들은 음반을 사기 위해서 대형 서점을 구석구석 찾아다니고 온라인 판매처에 남은 재고가 있는지 연락하여 확인하기까지 했다. 해외 팬이 일본 음반 매장에서 음반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일본까지 가서 사 오는 열정이 넘치는 팬도 있었다




내가 일본에 도착하고 제일 먼저 들렸던 곳은 난바에 위치한 타워레코드였다. 음반만으로 두 개의 층을 차지하고 있는 광경은 큰 충격이었다. 한국은 이미 많은 음반 매장이 문을 닫았고 대형 서점에 있는 음반 코너마저도 조그맣게 변하거나 자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명반이 가게 구석구석 놓여 있는 모습을 보니 설렘이 차올라서 한동안 타워레코드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나는 타워레코드에서 음반을 구입하는 데 10만 원이 넘는 돈은 지출하였다. 큰 금액이었지만 여전히 그 음반들을 잘 듣고 있기 때문에 결코 아깝지 않은 소비였다.


오사카 전역의 타워레코드를 찾아다니는 여행이 시작된 것은 음반이 쌓인 타워레코드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오사카로 여행을 갔다는 소식을 이달의 소녀 팬카페에 올리자 사람들은 일본에 남은 이달의 소녀 음반이 있는지 물었다. 이미 한국에서는 매물의 씨가 마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는 이상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오사카 전역의 타워레코드를 다 가서 이달의 소녀 음반이 어떤 것이 남았나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과연 오사카의 타워레코드에는 이달의 소녀의 음반이 몇 장 있을까? 그중에 한정판도 있을까? 어차피 오사카 여행에서 내게 정해진 일정은 몇 없었고 타워레코드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기에 시작했다.


난바를 시작으로 우메다, 아베노에 있는 타워레코드를 다 들렸다. 난바의 타워레코드는 (위에 언급했듯이) 2층을 다 차지할 만큼 컸고, 우메다의 타워레코드는 지하 1층이었지만 역시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베노는 백화점 내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앞의 두 매장만큼 크지는 않았다. 모든 매장에는 K-Pop 코너가 따로 있었고 웬만한 아이돌 음반이 다 있었다. 그리고 아직 한국에서도 유명하지 않았던 이달의 소녀의 음반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정판을 찾지는 못했다. 나는 타워레코드에 도착했을 때마다 팬카페에 재고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그럴 시간에 더 좋은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교토를 하루 더 방문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묘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필코 오사카의 타워레코드에 이달의 소녀 한정판 음반이 있는지 찾아내고 말겠다는 의지랄까…….


한정판은 일본 오사카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돌 음반을 찾기 위해서 여행 경로를 비트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으나 건진 것이 없었으니 부산에서처럼 또 한 번 헛발질을 한 셈이었다. 일본 여행을 마치고 그 시간을 돌이켜보며 참 나는 대책 없이 사는 성격이구나 또 한 번 느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느 날엔가 내 안의 덕력이 갑자기 여행지에서 눈을 뜨는 바람에 이상한 곳을 떠도는 일을 반복할지 모른다. 그런 황당한 선택마저도 내 여행의 일부임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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