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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Dec 11. 2024

단순노동

거의 매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비슷한 날들이지만, 사실 머릿속은 그렇지 않다. 매일 크고 작은 새로운 고민들이 생겨나고, 결정해야 할 문제들이 생긴다. 간단하게는 점심메뉴와 저녁메뉴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부터 물건을 살지 말지, 이번달에 살지 다음 달에 살지도 여러 가지 사정들을 고려해 가며 결정해야 하고, 크게는 업무 중 이 사안을 진행을 할지 말지, 이 사안의 결정이 향후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올지도...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내가 하고 있는 커피일도 당연히 커피를 좋아해서 시작한 것은 분명하지만, 일정 부분은 회사를 다닐 때보단 고민거리가 줄어들지 않을까 싶어서 선택한 것도 있었다. 물론 오만한 생각이었다. 세상 모든 일과 노동에는 소위 ‘일머리’라는 뇌 능력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아도 일머리가 없으면 일터에서는 도태되기 십상이다. 일머리는 단순한 지적능력의 영역이 아니라 순발력과 눈치가 더해진 좀 더 넓은 범위처럼 느껴진다. 카페에서 일하는 것도 그저 숫자에만 입각하거나 기계의 버튼만 눌러서 커피를 추출하는 게 아니라 그날의 날씨와 온습도까지 고려해야 하고, 숫자대로 잘 맞아떨어진 커피라도 모양이나 색깔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 느껴졌을 때 버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주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주문이 밀렸을 때는 메뉴 제조 순서를 단순히 주문순서데로만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제조할 수 있는걸 앞쪽에 배치할 수 있고, 여유롭게 앉아서 드시고 가시는 손님과 빨리 테이크아웃해서 가셔야 하는 손님의 상황도 고려해야 업무의 효율성과 손님의 만족도를 둘 다 채울 수 있다.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카페업무에서도 일머리는 필수적인 능력인 것이다.


이렇듯 매 순간 크고 작은 고민들과 결정들로 한껏 두뇌 풀가동을 하고 나면 잠깐이나마 멍 때리는 시간으로 뇌를 식혀주면 좋으련만 노동자의 삶이란 잠깐의 쉼도 쉽지가 않다. 방금 전까지 숨쉴틈 없이 일을 하고 아주 잠깐 먼산을 바라봤을 뿐인데, 상사들이나 사장님들은 하필 딱 그때 등장해서 ‘왜 근무시간에 딴생각을 하느냐’고 한 마디씩 한다. 그러니 잠시 뇌를 쉬고자 할 때, 하지만 상사에게는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단순노동’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카페에서 할 수 있는 단순노동에는 몇 가지가 있다. 다 사용한 시럽병의 라벨을 깔끔하게 뜯어내는 것, 원두봉투에 라벨 스티커를 붙이는 것, 메뉴제조에 필요한 소스와 시럽을 채우는 것,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채소를 다듬어 씻는 일 등등.. 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을 때 단순노동이 필요한 일감들은 귀찮고 성가신일이지만, 뇌에게 쉼을 주고 싶을 땐 어떤 것보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꿀 같은 일감이다. 여러 가지 단순노동 일감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드립백 봉투에 라벨스티커를 붙이는 일과 레몬청을 담그는 일이다. 사실 드립백 라벨스티커도 애초에 드립백 봉투를 주문할 때 인쇄제작을 맡기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비용절감을 이유로 몇백 장의 봉투에 필요한 스티커를 프린터로 죄다 인쇄를 해서 하나하나 붙이게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단전부터 스트레스가 밀려오곤 한다. 그래도 꾹 참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공식적으로 일을 하면서 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니까.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레몬청을 담그는 일도 비슷하다. 매장에 엄청난 양의 레몬이 도착하면, 먼저 하나하나 깨끗하게 세척해야 한다. 껍질을 벗겨서 청을 담그는 자몽과 달리 레몬은 껍질째 썰어서 담그기 때문에 자몽보다 더 꼼꼼하게 세척해야 한다. 그리고 레몬을 슬라이스로 썰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썰기 노동에 들어가기 전에 예리하게 칼을 갈아주는 것도 필수다. 옆에는 세척된 레몬이 높게 쌓여있고, 나는 뇌를 쉬며 멍한 표정으로 서걱서걱 칼을 갈고 있다 보면 다소 살벌한 느낌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날카롭게 잘 다듬어진 칼날이 숭덩하고 레몬에 부드럽게 들어가면 급 기분이 좋아지면서 그때부턴 탁탁탁 신명 나는 칼질이 시작되는 것이다(말할수록 살벌해지네). 어쨌든 칼날이 무뎌서 레몬을 썰 때 손에 힘이 들어가면 손목에도 좋지 않고, 힘을 주다가 칼날이 미끄러져 다치는 경우도 꽤 있다. 그래서 언제나 레몬청을 담그기 전에는 꼭 서걱서걱 칼날을 갈아주곤 한다. (반대로 예리한 칼날에 손을 다칠 수도 있으니 너무 깊은 멍은 위험할 수도 있다.)

레몬을 썰때 뿜어져 나오는 레몬향도 기분전환에 참 좋다. 뭔가 마음과 머리가 깨끗해지고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실제로 청소세제에 레몬향이 흔하게 첨가되는 이유가 레몬향이 깨끗해진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어디서 주워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걸 몸소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또 레몬을 썰다가 만나는 오동통한 레몬 씨앗은 또 그냥 버릴 수가 없다. 제일 튼실해 보이는 씨앗으로 몇 개 따로 모아두고 나중에 잘 씻어서 발아시키면 귀여운 레몬새싹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길고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역시 단순노동만 한 게 없다. 그리고 또 아이러니하게도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도 단순노동을 하는 시간이 꽤 도움이 된다. 끝도 없는 스티커 작업을 하다가 맥락도 없이 번뜩 좋은 생각이 나기도 하고, 내내 풀리지 않던 고민거리도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해결방법이 떠오를 때가 있곤 하니까.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무조건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번 책상 앞에 앉거나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답이 나오지 않는 시간을 보내며 괴로워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모든 업무의 중간중간에 단순노동을 끼워 넣는 것이 좋다. 일을 하다가 잠시 산책하는 시간을 끼워 넣고, 일하는 중간 사부작사부작 청소하는 시간을 추가하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에는 일하는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지 않은 삶을 꿈꾼다. 물론 번뜩이는 좋은 생각을 현실로 실행하려면 어느 정도 책상에 앉아 집중하며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 역시 집중력이 좋을 때는 한자리에서 오래오래 앉아 생각을 현실로 바꾸는 일에 몰두하곤 하지만, 집중력이 다 닳아서 없어져버린 후에도 여전히 상사에게 보여주기 위해 바쁜 척, 몰입하는 척하는 일은 정말 고역이다. 그럴 때는 잠시 주변 풍경을 바라보거나 커피를 한잔 하면서 머릿속을 환기시키는 것이 적어도 내게는 더 잘 맞는 업무 방법이라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더 크게 깨닫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자리에 앉아서 긴 시간 집중이 가능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도 모두가 같진 않을 것이다. 어딘가 소속되어 일을 하고 있더라도 일하는 방법은 모두가 프리랜서처럼 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도 그게 가능하려나 모르겠지만.


엊그제는 요가 수련이 끝나고 마지막동작 사바사나(시체자세)를 하다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떠올랐다. 또 가만히 설거지를 하다가 잊어버린 중요한 할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제는 좋은 아이디어나 생각을 얻기 위해 일부러 단순노동거리를 찾아다니기도 한다. 가치 없는 일로 여겨지기 쉬운 단순노동에서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낸 경험이 있는 내게 그것들은 더 이상 귀찮기만 한 일로 치부되지 않고, 오히려 쉼터이자 보물터에 가깝게 느껴진다.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전속력으로 달릴 수만은 없다는 것을, 중간중간 잠시 주저앉아 숨을 고르거나 운동화끈을 다시금 동여매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단순노동을 하며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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