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언제나 덥고 힘든 계절이지만, 한 가지 위안 삼을만한 것은 여름휴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친구들과 혹은 가족들과 이번 여름엔 어디로 떠날지 계획을 세우고, 휴가 날짜를 맞추는 것부터 설렘의 시작이라 여름은 온통 휴가를 상상하고, 실현하고, 곱씹는 것으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한때는 나도 여름휴가를 계획하는 것으로 여름의 시작을 설렘으로 채운적이 있었다. 직업을 바꾸면서 여름휴가가 짧아지고, 휴가기간을 너무 임박해서 알게 되는 바람에 해외여행은 그만두었지만 국내에도 내가 못 가본 좋은 여행지가 많았고, 그렇게 어딘가로 떠나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길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이번 여름엔 휴가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올여름은 퇴사욕구가 가장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던 시기였다. 친구들이 각자의 여름휴가 계획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꿀 먹은 병아리처럼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 했고, 지인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사다 준 초콜릿이나 커피 같은 것들도 당연히 너무나 고마웠지만 생각만큼 반갑지만은 않았다. 나는 여름 내내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단단히 삐져서 화가 난 상태 같았다. 여름이 지나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건만 가을이 되니 단풍놀이를 간다고, 겨울이 되니 스키장을 간다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자 이번엔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을 간다고 하는 계획들이 또 들려왔고, 내 마음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부러움으로 지긋지긋한 내 현실이 더 분노스럽게 다가왔다. 아니 여전히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이쯤 되면 내가 여행을 자랑하기 좋은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아니지 이건 그냥 내 자격지심이지, 생각했다가 다른 사람들의 여행소식에 분노를 할 만큼 내가 여행을 그렇게 좋아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
나에게 누가 여행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라고 물으면 당연히 좋아한다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다만 내 현재에 할 일이 있거나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는 상태라면 즐겁게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이 숙제들을 모두 해결하고 떠나거나 아니면 다 그만둬버리고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라면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으려나.
물론 문제해결을 위한 생각정리를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해결의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부러워하고 있는 여행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단지 현재의 불편함과 어려움에서 잠시 떨어져 있으려는 도피성 여행은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밤의 심정으로 보낼 것만 같달까. 잠시 도피한다고 해서 두고 온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어 있을 리도 없거니와 오히려 돌아왔을 때 문제가 더 악화되어 있던 경우가 내게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여행은 첫 시작즈음에만 무언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 뿐이고,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앞서 말한 것처럼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밤의 심정이 찾아오곤 한다. 나는 차라리 집중해서 문제를 해결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포상 같은 여행을 떠나고 싶다.
어차피 당장 여행도 못 다니는 처지에 도피성여행이니 포상형 여행이니 운운하는 내 모습을 보니 처량하고 좀 웃기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내게 자잘한 여행을 선물하곤 한다. 트렁크에 며칠간의 짐을 싸게 될 일도 없고, 티켓팅을 미리 해둬야 할 필요도 없는 일상 속 기분전환과 같은 여행을 말이다. 주말에 시간적 여유가 있던 예전에는 소규모로 진행되는 작가들의 전시를 보러 가기도 하고, 차로 1시간 이내면 도착하는 이웃도시에 가서 그곳의 작은 서점과 카페를 경험하고 돌아온 적이 많다. 요즘은 주말에도 웨딩촬영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편집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웃도시를 다녀오는 일은 자주 할 수가 없다. 대신 맛있어 보이는 빵을 팔거나 독특한 인테리어를 가진 카페들을 미리 찾아놓고, 촬영이 끝나면 찾아가 그곳에서 편집업무를 한다. 편집이 일찍 끝나면 아이패드를 꺼내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지난주에는 프렌치토스트가 아주 맛있었던 카페를 다녀왔다. 프렌치토스트 맛집이 맞았던지 카페 문을 열자마자 내부를 가득 채운 고소한 버터향이 훅 끼쳤고, 며칠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떠올리면 코끝에 버터향이 맡아지는 것만 같다. 폭신하고 달콤했던 프렌치토스트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던 그 순간의 황홀한 기억은 내게 다시 일주일을 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의 내게 여행을 떠나는 일은 보편적으로 언급되는 견문을 넓혀주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 준다는 목적으로서의 여행이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밥을 먹다가 어쩌다 한번 먹어보는 특별식 같았달까. 시간이 흐른 30대 끄트머리에 와 있는 지금의 내게, 여행은 지금껏 쌓아온 나의 소중한 일상을 무너지지 않게 잘 유지하게 해주는, 원기충전을 위해 먹는 보양식과 비슷한 것 같다. 그럼 요즘하고 있는 일상 속 자잘한 여행들은 꾸준히 섭취하는 영양제 같은 것이려나.
꼬박꼬박 챙겨 먹는 영양제 덕을 톡톡히 보고 있지만, 그래도 다가오는 새해에는 그동안 여행을 참느라 수고한 내게 꽤 먼 곳으로 홀가분히 떠날 수 있는 보양식이자 특별식 같은 여행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