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낙엽처럼.
동자님들께 드릴 과자와 초콜릿을 사들고
소원암에 올라갔다. 스님께서 안 계신다.
산신각에도 천수천안관세음전에도,
해수 관음전에도 안보이셔서
신당에 들어가 봐도 안 계신다.
스님께서 출타하실 일정이 있으셨으면 내가 알고
있었을 텐데 이상하다. 혹시나 하여 서재에 들어가
보니 스님의 책상에 메모가 하나 올려져 있다.
' 소승이 업보가 많습니다. 아무리 중생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며 가보고자 하나, 벌레가 갉아
먹어 잎이라기엔 줄기만 남겨진 너무나 가볍디
가벼운 낙엽이, 떨어져서도 땅에 닿지 않고 허공을
떠 돌 듯, 모든 게 허망합니다. 이미 마음은 본디
바람인 듯 어딘가에 떠 돌고 있으니, 잠시 함께
머물렀다가 오고자 합니다.'
스님께서 상심이 크셨구나. 그렇지. 너무도 당연한
허망하고도 허망할 일이다.
다른 스님이나 무속인들처럼 금전적인 대가를 바라
는 것도 아니다. 소원암의 신명님들은 미리 기도
비도 받지 못하게 하신다. 누가 봐도 순서가 그게
맞고 당연한 것인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신도의 성불만을
위해 일구월심 빌어줘야 신도가 소원을 빨리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금전을 탐하는 마음이나
욕심이 앞서면 신도가 성불을 보지 못한다고 늘
말씀하신다.
그 후에, 고마운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는
건, 소원을 이룬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신다. 고생한
걸 알아주고 고마운 걸 알아주는 사람이면 더 큰
복을 받게 될 것이고, 약속한 게 없었으니 난 모른다
잡아떼면 그 사람은 거기까지 인 것이니.
그러나 세상 사람 중에 달라고 하지 않는 돈을 주는
이 뉘가 있으며, 다급할 때는 성불만 이뤄주시면
달도, 별도 따다 줄 것처럼 하지만, 급한 불을 끄고
나면 언제 내가 그랬냐는 듯이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진리인 것이다.
이런 듣보잡 세상 속에, 이렇게도 순수한, 제자보다
손님 걱정을 더 하는 신명이 어디 있으며, 자기 몸
축가는 것 상관 안 하고 생판 남을 위해 돌길에서
오체투지 하는 스님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내가 곁에서 보기에도 사람들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 속상하다. 그럴 때면 내가 한 마디씩 한다.
" 스님, 어차피 고마운 줄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스님이 이런다고 누가 알아줘요..? 나중에 잘하겠다
고 하고 다 안면을 바꾸는데, 미리 기도비도 많이
받고, 또 뭐냐 소원을 이루면 얼마를 내라 뭐 이런
약조라도 받으셔야지요. "
그러면 스님께선 그랬다간 동자님께 혼난다고, 사심
이 먼저 들어가면 될 일이 없다고, 어려운 사람들
일이 되게 도와주는 게 먼저라고 손사래를 친다.
" 아니 누가 이렇게 하는 것을 알기나 한대요..? 누가 알아주냐고요. 다 돈 많이 받고 성불시키는 줄 알 텐데. 저렇게 본인들은 원하는 거 다 이루고 스님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 밉지도
않아요..? "
그러면 또 그러신다.
" 하늘이 알고, 부처님이 알고 신명님이 알고, 조상
님이 알고 계시다고. 그럼 되었지 무엇이 문제냐고.
그래놓고는 본인도 사람인지라 상처받고 기운 빠져
힘들어하며 겨우, 겨우 마음 추스르면서 말이다.
그렇게 며칠 동안을 가끔 들려서 법당도 정리하고
마당도 쓸면서 돌아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도 화분이 말라 있는 듯하여 공양간에서 물을
떠와 화분에 주고 있는데, 문이 확 열리더니 성큼
들어선다. 스님께서 돌아오셨다.
" 다녀오셨어요.?"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급히
처소로 들어가시더니 법 복을 단정히 갈아입으시고
좌탁 앞의 방석 위에 좌정하신다.
나는 이게 뭔 일 인가 싶었다. 바람처럼 순간 소원암
에 돌아와, 며칠 만에 만난 나한테 인사도 안 하시고
아니, 인사도 제대로 안 받으시고 왜 저리 급하게
저러시나 싶어서 말도 못 하고 잠시 쳐다보고 있자
" 보살님, 곧 손님이 오실 겁니다.
이리로 안내해 주세요. "
" 네..? 손님요..? "라고 말을 하려는데 이미
큰 키의 젊은 여자가 법당으로 들어선다.
스님 말씀대로 안내하고 녹차를 우려 들여놓고
공양간의 의자에 앉아 남은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자니 한 참만에 그 젊은 여자가 합장하며 인사하
고는 법당을 나서 돌아서 내려간다.
" 어떻게 된 거예요 스님..? "
얼른 들어가 물으니 내용이 이러하다.
절을 떠나도 일반 사대부중이 아닌 터라 쉽사리
다른 곳에 가기도 어렵고, 갈 곳도 없고 하여
전에 기도하시던 곳에 들렀다고 한다.
이래 저래 심란도 하고, 내가 무엇하고 있는 것인지
허망도 하고, 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난 언제까지 이렇게 남을 위한 기도만 해야 하는
지도 묻고 싶고, 생각이 많아서 가만히 좌정하고
있으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옛날 생각도 나고 하여 잠도 자지 못하는 채로
며칠을 지내고 있었는데 오늘, 호출이 있었던 것이다.
" 이제 그만 돌아오지..? 오늘 점심때 지나서
손님이 오는데 꼭 만나봐야 할 손님이니 얼렁 와.
애쓴 거 알아, 그래서 우리가 많이 많이 봐줬으니까
이제 좋게 말할 때 오는 게 좋을 거야."
명도 동자님의 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