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망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하여
회사 1층 구석에 위치한 택배보관함에 내 앞으로 온 택배를 찾으러 간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비밀번호를 눌렀는데(비밀번호는 각 층마다 할당된 것으로 동일했고, 내가 알기로 회사가 이 건물에 들어선 이래로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다)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요란하게 삐익 소리가 나더니 경비실에서 사람이 튀어나와 소리를 질렀다. '거기 뭐하는 겁니까!' 나는 너무 당황했고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단 걸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목소리를 낮게 깐 채로 (언젠가부터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힘주어 내 처지에 대한 항변을 해야할 때면 목소리를 깔게 되었다.) 말했다. '제 택배를 찾으려고 하는데요. 평소랑 똑같은 비밀번호를 눌렀구요' 붉은 얼굴을 한 경비아저씨가 가까이 다가와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연설이지 일이 번거로워진데에 대한 원망에 더 가까웠다. '물어보지도 않고 비밀번호를 누르면 어떡합니까, 이거 빨간 불 들어오면 문제 생긴다구요, 하아 정말 짜증나네' 같은 말들.
난 너무 놀랐고 당황스러웠지만 속으로는 이 경비아저씨가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것은 회사의 시스템이 아저씨에게 불합리한 방향으로 세팅되어있기 때문이고 아저씨가 시스템을 만들고 책임지는 사람에게 직접 화를 낼 수 없는 약자이니 가까이 있는, 시스템의 피해자이기보다는 수혜자에 가까워보이는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며 아저씨는 언제나 불합리한 일들을 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한 채로 해결해왔을테고 그것은 무척 화가 나는 일일테니까 그런 화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할 무렵에 하필 재수없게 내가 걸린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방해하는 불순한 다른 생각들ㅡ이를테면 그동안 누구에게도 폭발시키지 않았을 화를 때마침 만만한 젊은 여성이 실수한 김에 표출한 것이며 만약 지금 다른 남성이 와서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고 삐 소리가 나고 빨간 불이 켜진다고 해도 그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아저씨는 별다른 불합리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그냥 여자가 하는 일에 불만이 가득할 뿐일지도 모른다는ㅡ을 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경비라는 직업의 어려움을, 중장년층의 일자리 문제를, 사회의 부조리함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아저씨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걸거야 내가 젊은 여자라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회사 복도에서 고작 비밀번호를 잘못 눌렀다는 이유만으로 혼나고 모욕감을 느낄 정도의 원망을 듣고 있는 건 아닐거야 아저씨는 늘 이런 일에 화를 내는 사람일거야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중간중간 '이건 내 피해망상이 아니야' '아냐 피해망상이 맞아' '난 기득권이야' '아냐 난 여성이야 그게 내겐 제1의 정체성이야' 같은 목소리들과 싸워야했다.
싸움의 끝에는 하나의 질문만이 남았다. 이건 나의 피해망상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