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wr Mar 08. 2024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질문하는 심리 스릴러

영화 〈메이 디셈버〉

6★/10★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청소년의 투표권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투표 제한 연령을 낮춰 청소년도 미래에 목소리를 내게 하자는 주장에는 호의적일 때가 많다. 청소년이 투표하기에 충분히 성숙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청소년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성적 보수주의, 엄숙주의 등의 이유도 있겠으나 최근 급증한 청소년 대상 그루밍 범죄 등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한 결과일 수도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심리 스릴러 〈메이 디셈버〉는 이 문제를 고민하는 데 하나의 참조점이 되어준다.     



  그레이시와 조는 부부다. 그러나 부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레이시는 36살에 조를 처음 만났다. 조가 13살일 때였다. 그레이시는 조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고,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조의 아이를 낳았다. 출소 후 이전 결혼 관계를 깨고 조와 결혼해 부부가 되었다. 그레이시가 첫 결혼에서 얻은 손자와 조와 결혼해서 얻은 아이는 같은 날, 같은 학교에서 졸업한다. 그레이시와 조가 사건 이후, 결혼 이후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엄청난 비난 속에서도 둘은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버텼고 마을에 정착했다.     


  그런 부부에게 엘리자베스가 찾아온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레이시와 조 사건을 영화화하는 작품에서 그레이시 역을 맡은 배우다. 엘리자베스는 영리한 사람이다. 부부와 함께 머물며 많은 것을 보고 들을 뿐 아니라 그레이시의 전남편과 변호사, 그레이시가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자 조의 친구인 조지도 만나본다. 모든 극적인 사건이 그러하듯, 그레이시가 강조하는 ‘사랑’만으로 두 사람의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연기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 이면의 감정과 맥락을 알아야만 깊어질 수 있다. 그래서 타고난 영리함과 작품에 대한 집요함으로 두 사람 사이를 계속 파고든다.     


  그레이시는 내내 엘리자베스가 불편하다. 엘리자베스가 관계의 다른 가능성을 파헤쳐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는다는 건 그가 수십 년간 지켜온 관계와 평판이 다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레이시는 점차 예민해지고 조에게도 이 감정을 드러낸다. 조는 달래지지 않는 그레이시의 불안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던 중 엘리자베스와 조 두 사람만 함께 있는 자리가 생기고, 조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그레이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제안한다. 조가 그레이시와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려서다. 조는 혼란스럽다. 엘리자베스의 말이 맞다. 하지만 자신이 떠나면 그레이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조는 그레이시와 가족에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물꼬를 튼 조의 마음은 결국 그레이시에게도 흘러간다. 조가 그레이시에게 묻는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겪어내며 결정할 때 내가 너무 어렸다면? 그레이시는 무너져 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둘이 처음 관계를 가진 날 누가 리드했느냐고 반문한다. 함께한 20여 년의 세월을 한쪽은 가스라이팅으로, 다른 한쪽은 사랑으로 의미화하며 충돌한다. 영화는 그레이시를 절대 악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레이시의 예민함이 트리거가 되어 조가 오랫동안 그레이시의 입장을 ‘자발적 강제’로 수용한 듯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일궈온 모든 것이 그레이시의 의지만으로 가능했을 수는 없다. 그레이시는 자신의 믿음을 현실로 만드는 일에 진심을 다했고, 조 역시 ‘진심’을 다해 짝을 맞췄다. 한편 조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질문한 엘리자베스는 맡은 배역을 ‘진실하게’ 연기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조는 잠시나마 엘리자베스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조는 그저 적당히 호감 가는, 스쳐 가는 사람일 뿐이다. 그 결과로 조는 (어쩌면 성장의 근거가 될지도 모를) 혼란에 빠졌고, 그레이시는 조와 자신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평생의 믿음이 깨졌다. 그렇다고 엘리자베스에게 조를 책임지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일에 충실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관계 이면의 무언가를 들추어냈을 뿐이다. 영화는 조의 억눌린/뒤늦은 성장통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끝난다. 생각과 감정에 남은 여운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시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돌아와보자. 청소년에게 성적 자유를 보장할 혹은 자유를 제한할 적정 연령은? 알 수 없다. 그저 한순간의 ‘자발성’이 어떤 맥락에서 구축되고 지속되는지를 면밀하게 읽어낼, 성적 자기결정권이 손쉽게 단정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데 둔감하지 않은 섬세한 해석틀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묘〉는 장재현 감독의 진일보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