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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Oct 04. 2024

130년의 고독을 건너 울려 퍼지는 역사에 관한 물음

부산국제영화제, 〈다호메이〉


다호메이 Dahomey

France/Benin/Senegal/2024/68min     


*시놉시스

영화는 파리 케 브랑리 박물관이 보유했던 다호메이 왕국의 보물 26점을 본국으로 반환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베냉으로 송환된 보물은 방문자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박물관에 진열해야 할까, 아니면 본래 종교적 오브제로서의 기능을 살려 대중에게 돌려줘야 할까?          





  130년 동안 태어난 땅에서 단절되어 어둠 속에서 존재하던 무언가가 있다. 그는 내내 침묵을 강요당해 자기 의사를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견뎌야 했던 고독은 가혹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그는 다시 빛의 세계, 즉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의 고독은 낯섦과 현기증으로 바뀐다.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곳, 자신이 떠나올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진 곳이 야기하는 감정이다.     


  그는 다호메이 왕국 출신의 조각상이다. 현재는 아프리카의 베냉 공화국이 있는 자리다. 다호메이의 문화재 7천여 점은 프랑스에 식민 통치를 당하던 시절 바다를 건너 강탈당했고, 그중 26점이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다호메이〉의 영화적 성취는 인간이 아닌 이들 문화재에 목소리를 부여한 데서 나온다. 프랑스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상어 문장(紋章)을 한 반인반수 조각상의 모습을 한 다호메이의 왕은 이 귀환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까?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호메이 왕(조각상)의 목소리는 영화의 질감과 정서를 단번에, 그리고 근본적으로 주조한다. 그는 동시대 베냉‧프랑스 역사의 주인공이자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다호메이 조각상의 귀환은 단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저 제국주의자들에게서 빼앗긴 문화재를 돌려받았다는 단선적인 설명은 그의 낯섦과 현기증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감동적인 귀환이 마무리되고, 다호메이를 국가 차원에서 환영하는 대대적 행사가 영화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낯섦과 현기증은 본격화된다.     


  먼저 지금 프랑스에서 다호메이를 돌려받는다는 것의 의미다. 이야기의 주체는 다호메이 조각상이지만, 그를 운반하는 주체는 국가다. 베냉 공화국에서 다호메이 조각상은 순식간에 국가, 민족, 역사, 문화의 상징이 된다.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상징물로서 집단적 피식민 주체성을 주조하는 수단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낯섦과 현기증이 파생된다.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의 의미에 대한 토론회에서는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폭발하듯 분출한다. 누군가는 현 대통령의 조상이 프랑스 편에 섰던 자였다는 점을 들어 위정자의 역사 세탁을 고발한다. 누군가는 수천 점의 문화재 중 26점만 반환된 것에 강한 불만을 표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번 반환이 프랑스의 이미지 정치의 일환일 뿐, 베냉이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제국주의 역학의 문제를 짚는다. 돌려받은 문화재를 어떻게 교육하고 관리할 것인지도 문제다. 다호메이가 국가적 상징이라면, 도시에 사는 사람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접근성 격차는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이들 문화재는 각각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번 반환을 출발점 삼아 변화를 모색하자는 희망파와 오만한 프랑스에 또 한 번 놀아났다는 비관파 등등 논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다호메이의 목소리는 동시대 베냉 공화국 시민들의 목소리와 공명하며 낯섦과 현기증의 세계로 진입한다. 130년 만의 귀환이라는 초현실적 판타지가 자아내는 낭만은 다층적 권력 관계가 어지러이 교차하는 현실의 한복판에서 희미해진다. 그 대신 첨예해진다.     


  다호메이 조각상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인가?” 이 말은 자신을 마냥 환영해주지 않는 후손들에 대한 한탄일까? 그렇지 않다. 또 다른 목소리를 들어보자. “나는 당신들을 통해 나를 선명하게 본다.” 다호메이는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행이, 프랑스에서 베냉으로의 이동이 온전한 기쁨과 승리의 역사일 수만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130년을 고독 속에 있던 만큼, 자신이 의탁할 곳이 자신을 둘러싸고 폭발하는 담론의 바다에서 지난한 시간을 거쳐 마련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베냉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얼굴을 비추는 영화의 시선은 후손을 바라보는 다호메이 조각상의 시선이다. 그 다양한 삶에서 솟아나는 치열한 토론과 논쟁 끝에 이른 합의의 지점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명을 드러내는 시선 말이다. 하나의 목소리지만 여러 목소리가 혼재된 듯하고, 누군가 꿈과 환상으로부터 말을 걸어오는 듯한 조각상의 목소리도 같은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약탈과 반환, 지배와 피지배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역사를 이해하고 논쟁하는 법에 관한 〈다호메이〉의 물음은 베냉만의 것이 아니다. 다호메이의 목소리는 식민자와 피식민자 모두에게 역사에 대한 복잡한 사유를 긴급하게 요청한다.          



*영화 매체 〈씨네랩〉 초청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 상영시간

10-03/10:0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5관

10-04/10:3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10-09/20:30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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