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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쓸쓸하다고 하여 우울할 필요는 없다

서른 살에 관한 루머? 반박 가능


  서른 살이 됐을 때를 돌아보면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주변에서 자꾸 호들갑을 떨어대니 서른 살이 된 바로 지금이 내 인생의 유일하고도 중요한 변곡점이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른 살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다. 잔치는 끝났다고도 했고, 이제 지킬 것이 많아져서 겁이 많아진다고도 했고, 점점 새로운 친구 사귀기가 어려워진다고도 했다.  


  장도수에겐 서른 전에도 딱히 잔치랄 게 열린 적이 없을뿐더러, 가진 것도 별로 없어서 지킬 것도 따로 없었다. 그래서 그런 말들에는 별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딱 하나, 바로 ‘서른이 넘으면 점점 새로운 친구 사귀기가 어렵다’는 말 만큼은 근거 없는 루머이길 진심으로 바랐다. 안 그래도 몇 없는 친구들 중에 시간이 흐르면서 또 멀어지는 바람에 이제 정말 한 줌 친구들밖에 안 남았는데, 앞으로 새로운 친구 사귀기가 더 어려워진다면 비혼을 지향하는 내 노년이 지독하게 고독할 것 같았다.


  사실 ‘이러다가 혼자 늙겠구나 하는 경각심’은 이미 들었던 적이 있었다. 대학생 시절 동아리 방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남자선배가 대뜸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가만 보면 너는 무슨 친구를 연애하는 것처럼 까다롭게 사귀는 것 같아.”

   무슨 말인지 헷갈려서 몇 초간 대답하질 못했다. 나더러 친구가 별로 없다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이라고 꾸짖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 친구들이 정말 다 좋은 사람인 걸 보면 그 선배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닌 것 같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내가 유독 예민하고 까탈스럽다면 친구 사귀는 방식을 손봐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건드려야할지 감이 안 잡혔다. 친구를 사귈 때 나만의 기준이 있는지,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지… 그런 걸 한 번도 의식해본 적 없었다. 물론 친한 친구들이든 이제는 멀어진 친구들이든, 한 번이라도 친밀한 시기가 있었던 친구들에게 공통점이 있긴 했다. 우리의 첫 만남이나 그들의 첫 인상 같은 것들이 굉장히 또렷하게 기억난다는 것이다. 무슨 시그널이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서로를 알아보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물론 개중에는 지금은 근황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과 친밀하게 우정을 주고  받았던 시기는 분명히 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 있었다는 말이 곧장 서로 함께 백년해로할 운명을 직감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어느 시기 동안 너와 굉장히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될 거라는 예감을 했다는 정도의 말이다.


  초연 때부터 챙겨본 뮤지컬 <아이다>에는 천년동안 이어져온 인연으로 설정된 두 주인공이 “난 널 알아(I know you)”라고 주고받는 대사가 나온다. 15살에 초연을 봤을 땐 별 생각 없었던 것 같은데, 관람을 거듭하다 마침내 32살에 육연을 관람하게 됐을 땐 그 대사가 굉장히 중요하게 들렸던 기억이 난다. 단순하게 ‘나는 너를 알아’가 아니라 ‘나는 널 알아봤어’라는 발견의 의미로 들렸다.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과의 첫 만남이나 첫 인상도 <아이다>에서의 “난 널 알아” 같은 대사와 비슷하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너를 특별하게 발견하는 순간이자, 나 역시 너에게 특별하게 발견되기를 내심 바라게 되는 순간이었다. 


  원래 친구는 이렇게 사귀는 건 줄 알았다. 친구관계든 연인관계든 상관없이 모든 관계의 시작에는 이렇게 서로를 발견하는 단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게 나만의 전제이고, 내가 유독 까다롭게 구는 거라면 그 선배 말이 맞다. 나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지나치게 까다로운 사람이다. 그렇다면 하루빨리 이 습관을 바꿔야지, 안 그러면 내가 친구도 없이 고독사할 게 분명하다!


  그게 20대 초반 때의 결심인데, 타고난 성미는 어디 가질 않는다고 30대가 된 지금도 그 결심을 성공하지 못했다. 그 발견하는 단계를 건너뛰고는 누군가와 선뜻 친구가 되긴 어렵다는 뜻이다. 다만 고독사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별로 안 한다. 내 까다로운 성미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어간다고 하여 딱히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유난히 더 어려워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특별하게 발견하는 경험은 계속 되었다. 누군가에게 특별하게 발견되기를 바라게 되는 경험도 계속 되었다. 그 중 몇몇과는 시간의 파고를 이기지 못해 소원해질 때도 있었다. 그럼 좀 지칠 법도 한데, 나는 속도 없이 자꾸만 누군가를 알아보게 된다. 아무래도 까다로운 성미를 타고난 대신, 지치지 않고 발견하는 근성도 같이 타고난 모양이다. 


  이런 낙관을 갖게 된 건 딱 서른 살 때의 경험 때문이다. 서른 이후부터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루머를 반신반의하며 두려워하던 때였다. 누군갈 만나게 됐는데 상대방은 업무 차 알게 된 사람인데다가, 우리가 만나기 전부터 공통 지인이 줄곧 “둘이 잘 맞을 것 같아”라고 얘기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별 기대가 없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클 거라는 걱정에 대한 방어태세이기도 했고, 그런 말을 들은 이상 내가 상대방과 잘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해도 이미 그것이 온전히 내 감각이지 않은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를 만나보니 왜 공통 지인이 우리더러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는지는 너무 알 것 같았다. 비슷한 경험이 많았고, 겹치는 취향도 많았다.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 같이 편안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큰 의미부여는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 유난히 까다로운 성미를 지진 사람이니까! 


  생각이 바뀐 건 딱 한 단어 때문이다. ‘겨울 냄새’라는 단어.


  내가 ‘겨울 냄새’라 부르는 것이 있다. 겨울이 코끝까지 다가오면,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특유의 냄새가 난다. 쓸쓸한 줄도 몰랐는데 문득 쓸쓸해지고, 그리운 줄도 몰랐는데 누군가 그리워지는 냄새다. 매년 겨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마음까지 아려오는 걸 보면, 겨울 냄새란 단순히 후각에 그치는 감각이 아니라 아주 복합적인 공감각이 틀림없다. 어쩌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녀에게 ‘겨울 냄새’라는 단어를 흘리듯 이야기했는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겨울 냄새요?”

  아, 내가 너무 모호하게 말했지 싶어 부연하려던 찰나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겨울 냄새를 알아요? 어쩐지…. 나 장도수 씨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겨울 냄새를 아는 사람일 것만 같았어요.” 


  아, 이런 상황에 어떻게 상대방을 알아보지 않으려 계속 애쓸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온 우주의 기운이 우리더러 서로 알아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비슷한 감각을 공유한단 걸 깨닫고 우리의 대화는 점점 주제를 넓혀갔다. 


  “저는요 더운 걸 너무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여름보다는 겨울을 사랑하고, 봄보다 가을을 좋아해요.” 

  “맞아요. 근데 왜 겨울 냄새가 나면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걸까요. 쓸쓸함을 넘어서 가끔은 왜 가슴이 저릿저릿 하잖아요.”

  “저는 해질녘 시간대도 그래요. 해가 지고 어두워지려는 그 찰나의 순간에 좀 우울해져요.”

  “저도 그래요. 근데… 그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하지 않아요? 아, 저만 그럴 수도 있어요. 약간 변태처럼.”

  “아니에요 저도 그래요. 그럴 때 느끼는 감정에는 분명히 행복도 있는 것 같아요. 일종의 향수 같은 느낌도 있고.” 

  “맞아. 근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행복이고 무엇에 대한 향수인지는 모르겠어요.”

  “솔직히 이거 되게 별로라는 생각도 해요. 이런 거 안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매일 해지는 시간마다, 매년 찬바람 부는 계절마다 기분이 이상하잖아요.”


  마침 한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라 해가 길어지던 때였는데도 해가 지도록 대화는 계속됐다. 누가 보면 뭐 저런 얘기로 해 질 때까지 떠드나 싶었을지도 모른다. 눈부시게 파랗던 하늘은 잔뜩 붉어지다가 이내 빠른 속도로 빛을 잃으며 어두워졌다. 이윽고 해가 지자 더위가 멀어져가고 쌀쌀한 바람이 성큼 다가오는 게 온 피부로 느껴졌다. 우리가 앉아있던 카페의 창밖에는 아직 여름티를 벗지 못한 진녹색 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창밖으로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서울 한 복판에 이런 곳이 다 있네요. 아름답다.” 


  아주 나중에 그녀와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면 방금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방어선을 세웠는데도 나는 어느새 또 그녀를 알아보고야 만 것이다.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재차 말하지만 그 때 내가 이미 서른이었다. 이로서 두려워했던 루머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실증적으로 밝혀졌다. 역시 대부분의 루머는 사실이 아니다. 서른에도 친구는 생긴다.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픈 것들. 


  ‘겨울 냄새’라던가 해질녘 무드 같은 것들은 슬퍼서 아름다운 걸까, 아름다워서 슬픈 걸까? 우리는 이런 모호한 말들로 겨루다가, 둘 다 맞는 말인 것 같으니 그냥 슬프고도 아름답다고 해두자고 대충 마무리했다. 


  그리고 우리가 공통되게 쓸쓸해서 슬픔을 느끼는 순간들을 몇 개를 더 꼽아보았는데 그 중에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뒤 공허할 때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들 어느 정도는 공허함을 느끼기야 하겠지만 우린 그 정도가 좀 심했다. 


  나의 경우, 어렸을 때 수련회를 다녀오면 매번 그렇게 몸이 아팠다. 실제로 열이 펄펄 끓었던 적도 있다. 병인이야 당연히 별거 없고 그저 지나간 시간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엄마 얘길 들어보면 나는 기어 다니던 때부터 유독 청승맞았던 것 같다. 우리 집에 놀러온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제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남동생은 제 방에서 신나게 혼자 노는데 나는 해가 저물도록 베란다 난간에 다리를 한 짝씩 걸치고 앉아있더란다. 조그만 애가 저기서 뭘 하나 내다보면 그들이 떠나간 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울고 있었단다. 청승도 그런 청승이 따로 없다. 타고나길 청승맞다니 이건 분명 불행한 일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심지어는 이십대 후반까지도 그랬다. 여느 신입사원 연수가 그렇듯 동기끼리 다 같이 하루 종일 교육을 받고, 밥을 함께 먹고, 밤늦도록 한 방에서 수다를 떨다 돌아온 이후였다. 오랜만의 단체생활에 조금 진이 빠지긴 했는데 막상 해산 후에 집에 오니 쓸쓸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슬프기까지 했다. 빈 집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동생이 버젓이 집에 있었는데도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나를 백번 이해한다고 했다. 자기도 친구들이나 동료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뒤에 집에 돌아오면 그렇단다. 괜히 이런 볼멘소릴 하기도 한댔다. 


  “나만 힘들지 지금?! 너네는 이미 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행복한데 나만 이렇게 그립지!?” 


  우리는 서로의 청승맞음에 깔깔대며 웃다가, 각자의 타고난 불행을 비관하다가, 이제 제발 이런 청승은 그만두자고 약속했다. 지킬 수 없을 걸 뻔히 알면서도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러니까 쓸쓸함이나 슬픔 같은 걸 영원히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행복도 영원히 양보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마침 그로부터 며칠 후에 프로이트의 짧은 글을 읽게 됐다. 제목은 <덧없음>이었고, 모든 것들이 덧없다는 사실에 내내 슬퍼하기만 하는 어느 시인이 등장한다. 그 시인은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지만, 정작 그 아름다움 속에서 환희나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긴 해도 동의할 수는 없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인생은) 덧없다. 그러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덧없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마저 비관하는 시인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삶이란 것은 덧없을지언정 순간 순간 찾아드는 환희와 행복은 누려야하지 않느냐고, 그것까지 포기하면 어차피 네 손해라고 달래보고 싶기도 했다. 헌데 문득 시인의 모습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덧없음에 압도되어 아름다움에 몰입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내가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그 시인처럼 어리석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제야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그 시간동안 너무 아름다운 걸 목격하고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뒤늦게 쓸쓸하고 슬퍼지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그 후폭풍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노릇이었다. 쓸쓸함이나 슬픔 같은 것들은 할 수만 있다면 내게서 일순위로 도려내고 싶은 감각이었는데, 이제 그것들이 오히려 행복했던 시간의 반증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쓸쓸함과 슬픔을 감당할 용기가 생겼다. 덧없음에 경도되어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던 그 시인처럼 나도 여태 헷갈렸던 셈이다. 


  프로이트의 문장을 빌어 다시 쓰겠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것들은 지나고 나면 종종 쓸쓸하고 슬프기도 하다, 다만 그렇다 하여 아름다움과 행복 자체에 무감해질 필요는 없다. 


  크나큰 생각의 변화였지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이런  변화를 공유하지는 못하고 1년이 흘렀다. 


  이제 가을에 접어들었니 조만간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이다. 다시 그 때의 카페 창가자리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향수의 대상은 행복했던 시절이고, 해질녘이 가슴 아픈 건 아름다워서다. 쓸쓸함에 슬퍼지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매번 그립고, 그렇게 그리워했기 때문에 마주하면 이내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아이러니다. 우리는 어쩌면 고통스럽게 행복의 존재를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해 겨울 냄새가 날 때쯤엔 그녀에게 연락을 해보아야겠다.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아름다운 계절이 왔다고, 혹시 쓸쓸함과 슬픔을 느끼고 있느냐고. 나도 그렇다고, 하지만 왠지 이번 겨울에는 행복할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고. 쓸쓸하고 슬프다는 게 불행의 표식이 아니라 행복의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걸 걸 깨달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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