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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올챙이적 기억을 잊지 않는 개구리

올챙이적 기억을 잊지 않는 개구리


  회사생활에 있어서 나는 참 운이 좋았다. 현재 나의 평판에 대해 가감 없이 전해주는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직장에서도 그랬고 지금 직장에서도 그랬다. 나는 그저 이 말을 해주는 선배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솔직한 속내를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테니, 이렇게 직접 전달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들을 통해 나는 나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부정적으로 해석되었다는 행동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내 회사생활을 응원해주고 평판관리에 도움을 주는, 회사생활의 구원자였다. 


  물론 그가 전해주는 나에 대한 평판과 여론들을 듣고 있노라면 억울하고 속상할 때도 있었다. 선의로 한 행동이 정반대로 곡해되었단 소식을 들을 때 억울했고, 내 앞에서는 웃는 얼굴로 친절하기만 했던 사람이 뒤에선 내 욕을 하고 있단 소식을 들을 때엔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귀를 틀어막고 아무 이야기도 전해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고금 막론하고 몸에 좋은 것은 쓰다기에 견뎠다. 일시적으로는 나를 괴롭게 하는 말들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땐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으며 버텼다. 이런 말을 전해주는 선배들은 얼핏 보아선 나를 괴롭게 하는 것 같아도 실은 나를 도우려는 구원자일 거라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내가 후배를 받은 다음이었다. 어느 후배의 행동거지가 다소 불성실하다고 생각하던 와중,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그런 행동을 거북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료들은 맞선배인 나를 통해서 그 행동을 지적하고 싶어했다. 내가 후배를 불러내 불성실한 면모에 대해 한 마디 하길 바랐다. 내가 선배로서 진짜 그 후배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 ‘한 마디’를 해줘야만 한댔다. 하지 않으면 나는 후배에게도 조직의 미래에도 관심이 없는 철저한 개인주의자, 이기주의자와 다름 없댔다. 나는 ‘한 마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딱히 주변인들의 설득 때문은 아니었다. 메신저 역할을 단호하게 거부하기엔 나 역시 후배의 불성실한 행동이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긴가 민가 싶던 작은 불만이 동료들의 동의를 확인하곤, 한계를 모르고 점점 부풀려지다가, 마침내 정당화 되어버린 것이다.


  ‘한 마디’를 하기로 결심한 이후 머릿속으로 후배에게 훈계하는 장면을 계속 상상해보았다. 후배를 찾아가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단호하게) 내 생각에 너의 행동은 옳지 않다. 시정하는 편이 좋겠다.”


  하지만 이건 너무 꼰대 같고 고압적인 발언처럼 느껴졌다. 나도 대놓고 훈계질 하는 선배는 되고 싶지 않았다. 여느 신세대처럼 너그럽고 쿨한 선배가 되고 싶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마법처럼 이런 장면이 완성되었다. 


  “(너그럽게 웃으면서) 아니, 나는 잘 모르겠는데... 회사에서 이런 말이 돌더라고. 그래서 대신 이야기해주는 거야. 다 널 위한 얘긴데, 나 아니면 누가 전해주나 싶어서.”


  하지만 정말로 ‘나는 잘 모르겠는’ 게 맞나? 나도 동의하는 내용이지 않나? 그래서 다시 써보았다. 


  “회사에 이런 말이 돌더라고.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이야기해주는 거야. 그 편이 너한테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이걸 이야기해주는 게 정말 후배에게 좋을 일인가? 불편함을 느끼는 우리들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문장은 지웠다.


  “회사에 이런 말이 돌더라고.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회사에 이런 말이 돈다’는 소식이 반드시 알려야만 할 정도로 중요한 정보 값인가? 아니었다. 나의 지적이 온당하다는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덧붙이는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후배가 ‘회사에 이런 말이 돈다’는 정보 값을 추가로 알게 되어서 강화되는 것이라곤 불특정 익명의 다수에 대한 공포 뿐 일거다. 행동에 관해 지적하는 것이 이 대화의 궁극적 목표라면, 괜히 익명의 다수를 더 끌어들인다고 해서 후배에게 더 도움이 될 건 없었다. 그래서 또 다시 지웠다. 그러자 단출한 한 문장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너의 이런 행동이 거북하다.”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마무리됐고, 내일 후배를 불러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잠을 자려고 눕자 자꾸만 저 단출한 문장 앞뒤로 이런 저런 말들을 붙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여태껏 간신히 삭제해낸 문장들 말이다. 그렇게 해야 내가 좀 더 선한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기울어진 경사면에서 공을 굴리는 것처럼, 마음이 자꾸 미사여구가 많은 쪽으로 기울었다. 공 구르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 밤새 뒤척였다. 


  그러다 문득 고마운 선배들을 통해 나에 대한 평판을 전해듣던 때가 기억났다. 감사한 일이지만, 악몽을 꾸게 했던 순간들이기도 했다. 내가 꾸던 악몽은 이런 장면의 연속이었다. 회사의 모두가 전부 나를 맹추격하고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친다거나, 내가 하지 않은 행동으로 재판에 회부된다거나, 웃어주는 사람들 중 가짜를 고르려 했는데 기실 전원이 다 가짜였다거나. 하지만 이 악몽은 정말 꿈에 불과할 뿐이었을까? 


  이제 고작 뒷다리가 쑤욱 나오기 시작한 단계에 불과한 나는 아직 올챙이 시절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나에 대한 부정적 평판을 들을 때마다 매번 두려웠다. 그 부정적 평판을 발화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들은 늘 ‘누가 그러던데’ ‘어디서 들었는데’ 라는 말로 가려진채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흐릿한 실루엣은 그 자체로 공포였는데 왜냐하면 모두를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그 사람들이 누구일지 굳이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반드시 알고 싶었다, 날 스쳐간 모두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게 됐다. 방금 전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그 선배일까, 아니면 내가 친하다고 생각해왔던 그 작가일까, 아니면 내가 인사를 했는데 약간 서먹하게 받아주던 그 동료일까, 아니면 혹시 그들 전부일까? 이렇게 모두를 의심하게 됐다. 회사에서 마주치는 모든 낯이 가면처럼 느껴졌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전부 도마에 올라 투명할 정도로 얇게 포를 뜨이는 기분이었다. 익명의 다수를 주체로 세운다는 점은 바로 이런 면에서 잔인하다. 만인에 대한 이간질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는 모두로부터 고립된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불완전한 인간끼리의 커뮤니케이션에 오해가 발생하는 건 당연하다. 쌍방이 그 오해를 현명하게 해소해 나갈 때, 그들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해보지도 않고 제삼자에게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다른 한쪽을 비난하는 사람이라면, 그들 역시도 썩 어른스러운 사람은 아니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불만을 품을 순 있는데, 불만이 있는 것과 당사자에게 직접 불만을 표현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당사자에게 직접 이의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뒤에서만 궁시렁 대는 데엔 많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당사자의 수용력에 기대치가 없어서, 당사자의 인격에 문제가 있어서, 혹은 불만의 근거가 부실해서 등 이유가 무엇이든 말이다. 전자에 관해서라면 당사자의 어리석음 때문에 알릴 필요가 없고, 후자에 관해서라면 불만 자체가 온당하지 않기 때문에 당사자가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커뮤니케이션의 오해에 대해 제삼자가 한쪽 말만 듣고 훈계하거나, 행동거지에 대한 다수의 비난을 전달하는 방식을 통해 건강한 조직원이 탄생하고 건전한 조직문화가 형성될 거라는 생각은 철지난 미신에 불과하다. 경험상 그런 방식으로 생성될 수 있는 건 조직에 대한 불신과 불특정 다수에 대한 두려움뿐이다. 공포를 조장해 통제하려는 군주제와 다름없다. 개인은 고립되어 무기력함을 느낄 뿐이다. 올챙이 시절의 내가 그랬다. 그런 내가 또 한 마리의 올챙이를 고립시켜서는 안됐다. 그러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했다.


  내가 그 후배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어느 층위의 것인지 살폈다. 내가 거북했던 지점이 각자 스타일의 차이일 뿐인지, 잘못이랄 것까진 아니지만 사내문화상 관습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일인지, 절대적인 잘못인지를 판단해야 했다. 스타일의 차이라면 내가 가타부타할 일이 아니고, 절대적인 잘못이라면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그만이었다. 단, 주체를 나 장도수로 세워야했다. 그가 내 말을 듣고 익명의 다수를 떠올리며 모두를 두려워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적의 주체는 그가 뚜렷하게 볼 수 있고 실제로 만질 수도 있는 주체인 나여야만 했다. 나를 명확한 주체로 싫은 소리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꺼림칙한 일이다. 당사자가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꾸만 익명의 다수 뒤에 숨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용기도 낼 수 없다면, 내가 후배에게 느끼는 불편함 역시 감수하고 살아가는 것이 맞다. 


  후배의 잘못이랄 것까진 없지만 이 조직에선 관습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일이 벌어졌을 때가 가장 애매했다. 그런 경우엔 이 ‘조직의 관습’이라 불리우는 바로 그것이, 내가 후배들과 꾸려나갈 미래에도 유지되기를 바라는 행동규범인지를 먼저 판단해야 했다. 이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그 ‘조직의 관습’이라 불리우는 것들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탕비실에서, 한밤중에 수화기 너머로, 술 냄새가 진동하는 술자리에서 이러저러한 평판들을 전해듣던 모욕적인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솔직히는 후배들에게 너도 나처럼 참고 견디라고, 거지같지만 나도 선배들도 다 참고 해냈으니 너도 할 수 있을 거란 말을 하고 싶기도 했다. 좀 가증스럽긴 해도 위로하듯 토닥거리면서 말한다면, 사뭇 다정한 말처럼 들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건 나의 보상심리에 불과하다. ‘조직의 관습’이라 불리는 그 행동규범은 단언컨대 어떤 미래에도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조금 서럽고 억울하더라도 객쩍은 고집일랑 내려놓고 이 관습은 내 세대에서 끊는다고 결심해야 한다. 서럽고 억울한 마음은 회사 말고 다른 데에서, 이를테면 가족이나 애인이나 친구들에게 토로하며 해소하면 된다. 그리고 아마 나를 후배로 받았던 많은 선배들도 자신들이 서럽고 억울할지언정 많은 악습을 자기 대에서 끊어줬음이 틀림없다. 지금의 회사가 이전보다 나아진 점이 하나라도 있다면 모두 선배들의 그런 결심 때문인 것이다. 나의 서러움과 억울함은 그 선배들에 대한 보답인 셈 치기로 했다. 


  그 후배를 내가 따로 불러내 무슨 이야길 했는지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남겨두겠다. 다만 나는 그에게 거의 감사함을 느낄 지경이었는데, 그에게 무슨 이야길 해야 할 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여태까진 전혀 보이지 않던 선배 세대들의 고충과 결심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 어떤 기준으로 조직문화를 다루어야 할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자를 빙자한 악당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나는 나한테 미래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 번 올챙이 적 기억을 잊지 않는 개구리가 되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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