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워 보여도 전 좋은데요 #05
“대학생일 때 유럽 한 번쯤은 갔다 와야지”
대학 선배들이 했던 말이다. 미래를 위해 뭘 해야 할지 다들 막연했지만, 대학생 사이에서 해외여행은 인기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나중에 사회 나가면 더더욱 여행 가기가 힘들어져…”
막 사회초년생이 된 또 다른 선배가 했던 말이다. 대학생 때도 많이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입사 후 여행 갈 시간이 없어지자, 해외여행을 못 가본 게 아주 아쉽다고 했다.
그런 선배들의 말에 동의했지만, 정작 나는 해외여행을 가지 않았다. 갈 만한 여비도 없었고, 여행을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해외에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가끔 제주도로 국내 여행을 갔었다. 그렇게 나는 졸업 전까지 해외여행 버킷 리스트를 채우지 못하고 입사를 했다.
입사해보니 선배들의 말이 와닿았다.
정말 여유롭게 여행 갈 시간이 없었다. 시간을 빼서 갈 수는 있겠는데, 그렇기에는 돌아와서 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였다. 하루 이틀 연차를 써도 업무는 퍽퍽 쌓이는 상황에, 몇 주간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하지만 선배들의 말에 공감한 것과 별개로, 대학생 때 해외여행을 갔다 오지 않은 게 후회되지는 않았다. 여름휴가로 잠깐 제주도를 또 다녀오는 것으로 여행에 대한 욕구는 금방 사라졌다. 그런데 선배들이 말해주지 않은 다른 후회가 생겼다.
대학생 때 책을 많이 읽어두지 않은 게 후회됐다. ‘학교 공부나 취업을 위한 공부 말고, 책을 많이 읽어둘걸…’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재밌는 것은 내가 그전까지 독서를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독서는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학교 공부나 영어 공부는 남는 것이라도 있지, 독서는 뭐가 남는다고 할까?’라고 독서 무용론을 펼쳐왔다.
그런데 막상 취업하니 오히려 학교 공부나 영어 공부가 쓸모가 없었다. 물론 자료 찾을 때나 발표 등을 준비할 때, 학교에서 배운 방법이 도움은 됐지만, 업무에 필요한 핵심 능력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짧은 찰나에 타인과 다른 생각을 잘 풀어내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 능력이 바로 독서를 통해 길러지는 것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독해력이 좋아지고, 읽은 내용을 정리하면서 작문 실력이 늘고, 그 과정이 쌓이면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창의력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를 깨닫고 나니 책을 많이 읽지 않은 게 후회됐다.
그러다 이런저런 이유로 퇴사를 하게 됐다.
“여행 한번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퇴사했다고 주변에 말하자, 한결같이 들었던 말이다. 대학생 때와 똑같이 ‘여행’은 퇴사자의 인기 버킷 리스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행은 가지 않았다. 대신 회사에 다니며 느꼈던 독서에 대한 갈증을 풀고 싶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책만 읽었다.
책장에 책이 조금씩 쌓여가더니, 연말쯤에는 책을 100권 정도 읽게 됐다.
그렇게 읽고 나니 기분이 꼭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100권째 책이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착륙하는 기분이었다.
책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됐다. 조금씩 쓴 글에 조회 수가 쌓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누적 조회 수 40만을 기록하고 있다.
시간이 많다고 꼭 여행을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여행도 개인의 취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직접 발로 돌아다니며 여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통해 짧은 시간에 많은 나라를 구경하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브런치에서 글로 또 다른 사람들과 만날 기회도 생겼다.
아직도 해외여행을 제대로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나만의 촌스러운 방법으로 계속 집에서 책 여행을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