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른이 되는 여정의 시작
어릴적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 속에 위치한 어느 기숙학교를 다니던 나는, 방학을 앞두고 반드시 한가지는 선택해야만 하는 야외활동으로 '히말라야산 트래킹'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자연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몸소 체험했는데, 그중의 압권은 깜깜한 밤하늘에 쏟아지던 별들을 따듯한 모닥불아래 시나몬향 가득 풍기던 차를마시며 함께 바라보던 것이었다.
그때 나는 여러가지 생각을 했는데 그중의 한가지가 나의 결혼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나는 나중에 커서 누구랑 결혼하게 될까?'
'어떻게 살게 되는 거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이런 호기심들이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던 것 같다.
훗날 자라며 이런 호기심에 대한 대답은 우리 부모님에게 묻곤 했는데, 어려서부터 우리 아빠는
"여자는 좋은 혼처로 시집가 그냥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내조하며 행복하게 살면 된다." 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가부장적인 사고이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아빠는 어릴때부터 내가 가야할 학교와 학과 그리고 가야 할 길을 모두 설계해 두었는데,
그냥 시집가서 내조하며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나를 위한 그 많은 계획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마도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놓고, 실패할 경우의 수를 염두하여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운게 분명하다. (나도 부모가 되어보니 공들여 키운 자식에 대한 욕심은 이해를 하지만, 이는 부모의 욕심일뿐! 부모와 자식간 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고로 나는 내 아이들을 위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우리아빠 울타리 안 유리온실에서 곱게 자란 3남매의 장녀다.
아래로 여동생이 있고 그리고 다섯살 차이의 막내 남동생이 있다.
그러다보니 첫째의 책임감에 대해 말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장녀의 책임감은 이제는 인이 밖혔지만서도 때때로 현재진행형으로 내 인생의 무게감을 더해주곤 한다.
자연스럽게 모든일에 붙던 말들은, "넌 첫째잖아." "첫째인데도 왜그래?" "첫째니까 더 어질어야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네가 잘해야 동생들도 본보고 잘 되지" 등이었다.
물론 첫째라서 좋을때도 많지만 분명 할 일 또한 더 많다.
그래서 집안의 장녀인 나의 결혼은 일종의 책임감이라는 것때문에 더욱 완벽해야만 했다.
나는 스물 일곱 끝자락에 남편을 만났는데, 남편은 당시 사법연수원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법무관으로 군 복무를 마치면 판사의 길을 걸어갈 사람이었다. 좋은 혼처를 찾던 우리 아빠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사윗감이었으므로 동갑내기 커플이던 남편과 나는 일사천리로 준비해 만나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어느 가을날 결혼했다.
아빠가 원하는 사람과의 혼인이 좋은 결혼이라 생각했고, 나도 예비 판사라는 그의 배경이 꾀나 멋있어 보였다.
예쁜 드레스와 멋진 예식장, 끝없이 이어지는 쇼핑들..
행복한 일만 있을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들은 바로 결혼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우리부부는 대한민국 사회가 정의한 결혼 적령기의 남자와 여자 사람이었고, 그때 나는 다 컸다는 착각에 나름 나 스스로내린 성숙한 의사결정이라 굳게 믿었다.
그렇게 완벽해야만 했고, 완벽하다 생각했던 나의 결혼생활은 10년도 못가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 나는 판사남편과 이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