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꾼 건 단 한마디였다
해가 세 번 바뀌면 불혹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어리다는 말로 ‘까일’ 줄은 까이기 전까진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다.
나도 이제 나이로는 어디서 뒤지지 않는다 이거다.
<오스트리아의 '쿠르츠'는 31살, 핀란드의 '산나 마린'은 34살, 우크라이나의 '곤차룩'은 35살, 뉴질랜드의 '저신다 아던'은 37살에 총리에 올랐다. 대한민국의 김두관 국회의원도 37살에 남해군수에 당선되었고,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984년생으로 나와 동갑이다>
그런데 세상에 어린데 뭘 알겠냐는 소리를 이렇게 밥 먹듯 듣고 살 줄이야.
물론 내가 몸담은 이 현직 세상에선 아직도 나보다 어린 친구들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훨씬 많이 계신다.
그분들과 식사 한 번, 술자리 한 번에서의 이야기만 주워 담아도 이순신 위인전 저리 가라의 책 한권은 뚝딱 나올 기세다.
짬에서 나온 바이브?!
백번 존중한다.
그들의 오랜 세월, 그리고 그 깊이, 산전수전 공중전을 몇 바퀴 돌고 돌아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험난한 여정!
다 좋다 이거다. 하지만 존경을 표하고 박수를 보내드릴 수 있는 건 거기까지.
과연 그렇게 외치는 더 많은 나이, 더 많은 경력이 더 어리고 가능성과 능력을 겸비한 청년을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는 게 타당한 것일까?
언제나 ‘으른들’은 아직 이르다, 아직 어리다는 말로 경고하듯 세상만사에서 그들보다 젊은 사람들을 후순위로 미룬다.
문제는 그 한마디는 딱히 나쁜 말도,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수긍하고 반박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많다는 것이다.
‘아 아직 내가 멀었구나’ ‘맞아, 경험이 너무 부족하지’
이렇게 후퇴해버리고 만다.
이건 분명 예의, 공경 따위의 것들과는 다른 문제다.
그들이 세운 나이의 잣대로 나의 가치를 단정시키고 나를 소외시키는 으른들의 말들은 오히려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어린데 뭘 알겠어?” 라고 못 받는 대신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알려줄게” 라고
배움과 도움을 주시고 든든한 조력자가 돼 주셨다.
다시 말하지만 내 나이 서른일곱.
아직도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들과 싸워야 할 세력이 많다.
날마다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성장해가는 자세를 다짐한다.
청년들의 자신감을 꺾고 가능성을 억누르는 어른들이야 말로 ‘겁쟁이 으른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