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수훈의 파란도시 Aug 12. 2020

"너는 아직 기회가 많잖아"

나를 바꾼 건 단 한마디였다

기회. 아주 좋은 말이다.      


가능성으로부터 파생된 초긍정적인 단어.      


꿈과 희망에 든든한 빽이 되어주는 단어.      


기회를 상상하고 기회를 기대하는,

그것만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단어.

      



기회라는 말이 달콤한 이유 중 하나는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나 찾아올지 모른다는 예측불허의 속성에 있다.

      

누군가는 누구나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도 말하고, 또 누군가는 기회는 준비된 자의 몫이라고도 말하며, 다른 누군가는 기회를 엿보기 위해 무술인을 찾아가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기회를 얻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다. 반면에 빼앗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는 게 바로 ‘기회’라는 것이다.                




“너는 아직 기회가 많잖아” 라는 말을 듣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나의 재능과 능력 그리고 아직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내 자신감이 이 말 앞에선 힘을 잃고 주춤주춤하게 된다.      


마치 기회를 자진반납을 바라는 듯한 어른들의 언어.      


그런데 어른들은 그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그 기회의 횟수를 어떻게 정의하고 단정 짓는 걸까?      


조금 더 살았기 때문에?      


기회의 순서와 횟수를 남은 생애로 예단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경력이나 위치로 판단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10대엔 100번의 기회, 20대엔 그 절반, 30대엔 또 절반의 절반... 이렇게?      

그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었다.      


기회에도 나이 제한과 질서가 있다니, 이것만큼 무질서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청년들의 기회도 호시탐탐 탐내는 어른들은 대개 이런 말을 달고 산다.      


“아 그때 그 주식 샀어야 했는데”     

“아 그때 그 땅 사놨어야 했는데”      

“아 그때 재수를 했으면 서울대 갔을텐데”      

“아 그때 이직했어야 했는데”     


했어야 했는데~의 연속인 하루하루가 쌓여 지금의 그 어른들이 되었다.      

본인들의 놓쳤다고 생각하는 기회를 왜 다른 이에게서 되찾으려 하는 걸까? 

          



- 연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에 가장 높이 난다 -


즉 ‘위기는 기회다’고 말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격언은 냉정 시대 국제정치 가이드라인으로 널리 인용됐다.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충고다.      


기회가 다 지나갔다고 그때를 비관하고 현재를 발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아직 기회를 가져본 적도 없는 청년들에게 위기를 던져주어서는 안된다고도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화답하고 싶다.

     

“그동안 기회 많으셨잖아요 (그 많은 기회 어디다 쓰셨어요) ”  

작가의 이전글 "어린데 뭘 알겠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