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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홍 Nov 11. 2020

#2 당신은 좋은 돼지입니까?

#1 한경면 청수리 #2 대정읍 인성리  #8 한경면 청수리




기로岐路


      

      오래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통과됐다. 밤잠 포기하며 나를 갈아 넣은 결과물이었다. 최선을 다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지만, 결과까지 완벽하다. 이런 날을 그냥 넘기면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자- 나의 저녁 메뉴는 오감과 지갑을 살살 녹여줄 마블링 가득 소고기인가, 친구들을 불러다 밤새 무용담을 풀어내어도 좋을 노릇노릇 삼겹살인가, 어느 곳을 골라 들어가도 실패하지 않는 겉바속촉 진리의 치킨인가.

 

      우연히 연인의 거짓말을 알았다. 노랫말처럼 내가 가진 귀가 너무 좋아서 거짓말도 보이는데 그 사실을 그만 모른다. 새빨간 거짓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는 척해주는 것도 이제 한계다. 자- 나의 저녁 메뉴는 씹을 때마다 팡팡 터지는 곱으로 소주의 쓴맛을 달래줄 곱창인가, 고소한 기름은 끝이 없고 부드러운 식감은 술을 부를 뿐인 항정살인가, 온갖 날의 추억으로 눈물을 쏙 빼놓을 칼칼한 어묵탕인가.


      또라이 총량의 법칙을 반드시 지켜 보이겠다며 오늘도 상사는 열심이다.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저러나 싶다. 애인과 싸웠는지, 집에서 머리채라도 잡힌 건지, 오늘은 역대급이다. 자- 나의 저녁 메뉴는 입술을 내어주고 툭툭 욕지거리를 뱉을 행복이 보장된 불닭발인가, 내일 아침 장의 안부 따위는 잊게 만들 맵단짠의 매운양푼갈비인가, 땀이고 콧물이고 다 쏟아낼 게 환하지만 마치 상사를 씹는 듯한 카타르시스가 일품인 불주꾸미볶음인가.



      희대의 난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적잖이 고민이다.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상황이리라 생각한다. 혹시 명확한 선택의 근거가 있다면 공유를 부탁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건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돼지”라는 존재다. 언젠가 가족으로 뵙고 싶었던 분의 ‘놈의 살은 다 맛있어야-’라는 말씀대로, 사실 모든 고기는 맛있다. 그럼에도 유독 돼지만큼 우리의 생활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어딜 가든 기본은 하는 맛과 합리적인 가격은 물론 다양한 모습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나는 너를 믿어도 좋을까



      제주에는 내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동식물이 많다. 다른 말로 천연기념물이 많다는 의미다. 아마도 자연환경의 영향일 터다. 알고 있듯이 제주는 사시사철 바람도 많고 태풍도 쉬이 지난다. 일단 하늘이 꿈틀대기 시작하면 기세가 내륙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에 더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 습도도 상당하다. 이런 특유의 기후와 화산섬이라는 풍토에 적응한, 내륙과는 다른 형질을 가진 돼지가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285년), 『탐라지』(1651-1653년), 『성호사설』(1681-1763년), 『해동역사』(1823년)에서 보증하는 내용이므로 믿어도 된다.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된 제주 흑돼지가 이렇게 중요하다.







      40여 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흑돼지 구이 전문점이다. 입구에서부터 돼지들이 반긴다.  어수선한 시국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아이도 보인다. 누가 봐도 제주도임을 뽐내는 돌하르방과 잘 관리된 잔디가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차림표는 여느 고깃집에서 볼 수 있을 만한 구성이다. 다만 모든 고기 앞에 제주 흑돼지가 붙었을 뿐이다. 일단 대표 메뉴인 오겹살과 다른 부위들을 함께 시켜본다. 1인분씩 주문이 가능하기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니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웃뜨르 우리 돼지>의 흑돼지 오겹살(18,000원)




      평소 사삭스럽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한때 '고사삭'이라 불렸을 정도다. 그러나 나의 사삭에는 늘 타당한 이유가 있다. 제주에서 나는 고기를 먹고 눈물을 훔쳤다. “충격”과 “당혹” 그 쯤 어딘가. 전국 어디를 가든 ‘제주 흑돼지’를 표방한(내세운) 식당은 많다. 비싼 가격에 고민하다 시켜보지만 맛에 늘 의아해했다. 특별할 게 없었다. 그랬었다. 하지만 제주도의 것은 다르다. 단언컨대 다르다. 두꺼운 두께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두께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그걸 뛰어넘는 경지다. 나는 고기를 한 입 먹을 때마다 강한 의혹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고기에 설탕을 뿌린 게 틀림없다. 크게 자른 오겹살을 한 입 가득 문다. 그리고 오물오물 씹는다. 입 안에 별빛이 내린다. 샤랄랄라 랄라라. 이렇게 흑돼지는 내 여행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홍차와 마들렌이, 나에게는 흑돼지가 되는 순간.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창문으로 서늘한 아침 바람이 들어온다. 이따금 버스가 숙소 옆을 스치듯 지나는 굉음이 들린다. 외딴곳에 떨어져 있는 나와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다. 침대 위를 뒹굴거리니 콧노래가 새어 나온다. 점심은 무얼 먹나. 고민할 것도 없다. 흑돼지의 매력에 퐁당 빠진 이유로 오늘도 흑돼지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후, 약간 허름하지만 기운이 남다른 가게를 찾아낸다. 어제는 구웠으니 오늘은 삶아볼까. 진정한 고기는 굽지 않아도 맛있어야 한다. 제주에 왔으니 돔베고기와 고기국수를 먹어봐야겠다.



 

<대정 고을식당>의 돔베고기(13,000원)



      

     8개의 테이블을 놓고 노부부가 운영 중이다. 3시까지 영업이나 내 테이블을 마지막으로 모든 재료가 소진되었기에 이날은 1시 50분 영업 마감이다. 내 뒤로 몇 팀이나 되돌아 가는데, 그 소릴 들을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내 경우도 막걸리와 공기는 이미 떨어진 뒤였다. 고민 없이 돔베고기와 고기국수를 시킨다. 말없는 남자 사장님이 가져다주는 몇 가지 밑반찬을 집어 먹고 있으니 먼저 고기가 나온다. 무심히 썰린 돔베고기를 마주하는 순간 실망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 심지어 큰 체인점처럼 정갈하게 놓인 것도 아닌! - 수육의 모습이다. 다만 '돔베(도마)' 위에 올려 있을 뿐이다. 프로는 맛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먹어본다. "으앙! 고기야 미아내-!" 일찍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가 절로 나온다.




<대정 고을식당>의 고기국수(7,000원)



 

      나는 사삭스러우면서 다소 예민하다. 무던해지려 노력해도 향만큼은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고기를 좋아하지만 맛있게 먹는 건 쉽게 하지 못한다.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이곳도 고기에 설탕을 뿌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냄새도, 식감도, 거기에 맛까지 완벽할 수가 있겠는가. 잡내라고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고 식감은 소고기가 우습다. 맛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사진을 다시 보길 바란다. 눈치챘을지 모르겠지만 국수가 나오기 전에 돔베고기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고기국수는 육수가 깔끔하다. 느끼하거나 걸쭉하지 않다. 다만 양이 상당해 면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다 먹기가 버거울 느낌이다. 물에 빠진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엄마도 이건 맛있게 드실 것 같다.








      영화 <증인> 중 뇌리에 깊이 남는 장면이 있다. 한 소녀가 파란색 젤리를 통해 하늘을 바라본다. 소녀가 본 것이 하늘인지 그를 둘러싼 세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파란색 젤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그 믿음은 사실이고 진실이다. 팩트 체크 따위는 의미 없다. 그런 그가 정우성을 향해 묻는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냐'고. 나는 제주 여행을 하면서 한 가지 새로운 믿음 같은 게 생겼다. "제주 돼지는 믿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도 좋다. '당신은 좋은 돼지입니까?'



내 대답은 YES다.


      어떡하나. 이렇게 제주 흑돼지는 다시 절종 위기에 처하게 되는 걸까. 우려 섞인 염려를 해 보는 밤이다.








* 10편으로 계획했던 제주도 여행기는 천천히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기약은 없습니다. 마냥 소중하고 좋았던 추억이 바래졌기 때문이에요. 언젠가, 그때가 올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마음에 딱지가 조금 덮일 때쯤 조심스레 기억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끔은 술의 힘을 빌려야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꼭 마무리는 짓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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