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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Aug 26. 2023

이름아 안녕

딱-! 한문 선생님의 지시봉이 내 머리를 가격했다.

지시봉은 내 머리에서 떨어져 나와, 조금 전 칠판에 적은 내 한자이름인 孫敬勛을 탁탁탁 쳐 댔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이름이 어딨 있노? 고등학생씩이나 돼 가 지 이름 하나도 올케 몬 쓰나?"

"샘.. 이거 제 이름 이거 맞는데요? 공경할 경敬에 공 훈勛"

"뭐라카노! 이건 말도 안 되는 이름이다! 누가 이런 이름을 지어주노! 옛다! 한 대 더 맞아라. 고마!"

딱..!

"오늘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다시 물어봐.  들어가! 이 새끼야!"

고1 때, 그 한문선생은 내 이름이 왜 말도 안 되는 이름인지 알려주지 않고 내 머리만 두들겼다.

그 점에 대해 아버지에게 물어봤는데 아버지는 별 대답을 하지 않으셨고, 나도 곧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가.. 아버지가 어디서 이름을 하나 지어 왔다.

"철학관 갔더니 니 이름이 니 인생에 그렇게 안 좋다더라. 호찬이란 이름을 지어 왔으니 앞으로 호찬이란 이름을 써라. 하늘 호(昊) 도울 찬(贊) 하늘이 돕는다는 뜻이다."

아.. 맞다. 그때 다시 생각났다. 내 이름이 이상하다는 주장.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호찬이란 이름은 몇 달 띄엄띄엄 불리다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수년 뒤 20대 초반에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가 사업 다 망하고 마지막 남은 돈으로 개업한 고깃집에서 일을 돕다가 그 이름의 부당함을 다시 듣게 되었다.

대구 경북 쪽에선 가장 유명한 작명가라는 양반에게 아버지가 문득 내 이름을 물었나 보다.

꺼져가는 불판 앞에서 그 이름을 들은 그는 술판 위에  물축인 젓가락으로 내 이름을 써 보더니 고개를 절래 절래 젓고는 진짜 안 좋은 이름이라고 말하고, 내 생년월일시의 사주를 보고는 혀를 끌끌 차며 손경훈이란 이름은 최악의 이름이라고 말했다.

내 사주가 물의 기운이라곤 한 방울도 없고, 태양처럼 강한 화의 기운만 띈 사주라, 물이 필요하고 불은 피해야 하는데 어쩌고 저쩌고..

뭘 어쩌란 말인가 다 미신일 것을.. 나는 곧 잊어버렸다.


그러다 30대 초반에 재미로 아내와 궁합을 보러 갔다가 그 이름이 문득 생각나 철학관 선생에게 물었더니

"괜찮아. 별로 좋은 이름은 아니지만 보라고 이렇게 강한 불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니 사주가 강해서 이름 안타".. 라며 이름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또다시 10여 년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지난주에 아내와  시답잖은 수다를 떨다가 내가 농담조로 물었다.

"자기는 나보다 누난데 왜 나한테 이름을 안 불러?"

아내는 이름을 부르면 하대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다고 답을 했다.

내가 계속 내 이름을 불러 보라고 채근하자 아내가 웃으며 "경훈아"하고 나긋나긋하게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그리고 뜬금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갑자기 그 이름이 너무너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 이름에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지 않은가..

문득 생각해 보니 그 이름이 불리던 순간들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서럽고 힘들고 아픈 기억들만 그 이름에 구더기처럼, 기생충처럼 잔뜩 달라붙어 내 삶에 무게를 더 하고 있었다.

"좀 떨어져라! 떨어져!" 발을 떨치면 더 엉겨 붙는다.


에라.. 내친김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개명신청을 했는데 완료 버튼을 누르려다가 문득 든 생각에 중도에 멈췄다. 그래도 이 이름을 만들어 나를 경훈으로 43년간 살게 한 부모에게 말은 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며칠 뒤에 아버지에게 전화해 이름을 바꾸겠다는 말을 하는데 순간 말이 어버버 꼬여 버렸다.

나는 늘 그랬다. 나보다 연장자인 남에게 말을 잘하지 못한다.

그들 앞에선 이유 없이 주눅이 들고, 머릿속에선 막힘없이 흐르는 언어들이 입술 안쪽에 부딪쳐 와르르 넘어져 버리곤 한다. 때로는 말들이 내 혀에 달라붙어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는 바람에 혀가 꼬여 버린다.

그래서 애초에 그 정도의 연장자와는 아예 말을 하지 않고 살았기에

극복해 보려는 시도를 딱히 치열하게 할 일이 없었다.

삶의 초반에 부모에 의해 가공된 내 성격의 원형이 그러하니 어려운 일이긴 할 거다.

아무튼 이름을 바꾸겠다는 말을 전하고 난 뒤.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하던 개명신청을 마무리했다.


1981년에 8만 원이란 거금을 들여 어느 작명소 돌팔이에게 지어졌다는 내 이름을 다시 한번 살펴봤다.

공경할 경(敬)의 파자 (破字)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구차(苟且)할 구(苟)와 때릴 복(攵)으로 파자하는 것이다.

<살림이 몹시 가난하다.> 혹은 <말이나 행동이 떳떳하거나 버젓하지 못하다>는, 두 가지 사전적 의미를 가진 구차(苟且)한 (者)을  매질해서 얻어내는 것은 "공경" 으로 해석한다.

2. 개 구(狗)와 때릴 복(攵)으로 파자한다.

큰 개를 몽둥이로 때려 공손함을 이끌어 낸다는 해석이다.


훈(勛)의 경우. 설문해자에서는 勛을 勳의 古文이라고 했고, 대법원 선정 인명용 한자에서는 勳을 수록했는데, 훈 (勛)을 파자하면 더할 운(員)에 힘 력(力)을 합쳐 힘을 더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로 (功)"라는 해석이다.

동의의 글자인 공 훈(勳)을 파자하면, 불길 훈(熏)에 힘 력(力)을 더해 만들어진 글자로써, 불길 속에서 힘을 써야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로 (功)"란 해석이다.


요컨대 남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굴종당하고, 나를 강압적으로 억누른 자를 공경하고, 그 자를 위해서 불길도 마다하지 않고 힘을 쓰며 공적을 세운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 이 얼마나 거지 같고, 개떡 같은 이름이고.. 이 얼마나 내 삶의 함축판 같은 해석인가..

그 해석과 내 삶의 싱크가 얼마나 잘 맞는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내 삶의 거의 대부분이 이 이름의 해석과 같았으니..

아... 그래서 한문선생님이 내 대가리를 두들겨 팼던 거구나...

아... 그래서 이 이름은 말도 안 되는 이름이었구나.

1920년대에 지어진 개똥이나 말자 같은 개떡 같은 이름을 1981년에 지은 셈이구나..

... 싶었다.


개명하는 이름으로는 바를 정(正)에, 뜻 의(義)로 정의라 지었다.

손이라는 성을 가진 이 중 가장 유명한 손정의 회장의 이름을 땄다.

그의 이름의 한자가 무엇이든 한자는 正義로 하고 싶었는데 마침 그의 이름도 正義였다.

살펴보니 그의 본관은 나와 같은 안동일직 손 씨였다.

아내는 같은 가문의 어른 이름은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릴 적 보았던 우리 가문 족보는 상당히 깨끗한 새것처럼 기억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남을 위한 이름. 굴종적인 이름인 경훈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살면서 느낀 바. 정의처럼 독선적이고 일방적이며 칼 같은 단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라는 이름으로의 개명은 흡사 적의 칼을 빼앗아 적에게 휘두르는 기분마저 든다.

한때 즐겨보던 무협지의 클리셰들처럼..

힘없고 약한 주인공이 악당의 일격에 맞아 절벽 아래에 떨어져, 그곳에서 엄청난 검법 같은 것이 적힌 비급을 손에 넣게 되고 그 절벽밑에서 검법을 수련한 뒤, 강호로 출도(出道)하여 악을 멸한다는 무협지의 클리셰처럼..

불속에서 굴종당하는 자의 이름..경훈이라는 이름은 이곳 바다에 고립된 섬안에 가둬 두고 이젠 정의라는 이름으로 출도(出島)하리라.


이젠 내가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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