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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 Placid Aug 20. 2020

당신의 시그널

달토끼가 환한 밤에


"자니?"

"그럴리가요."


한여름의 햇살이 하도 휘황찬란하여, 한낮에 유성우가 쏟아지는 듯했습니다. 그런 오후의 끝과 잇대어지는 밤에는 어김없이 달토끼가 환하고요. 나는 그것이 일찍이 하늘로 가버린 당신의 시그널이라는 것을 압니다. 필히 깊은 밤에 당신이 말을 걸어올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선 이쪽 사정이 훤할 테니, 잘 지낸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유약한 삶이지만 괜찮습니다. 몸에 배어들어 담담하니까요. 여울지는 감정도 이젠 그닥 생경하지만은 않고요.


여울지는 감정도 이젠 그닥 / Tokyo, Japan


나선을 그리며 걷다가 길의 끝에 다다랐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될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허기진 마음. 딛는 발걸음에 힘을 들이는 것조차 버거운 삶이더군요. 걷는 동안 자주 넘어지기도 했고요. 툭 털고 일어나 가던 걸음 마저 이으면 될 것을, 나는 넘어진 채 거기에 혼자 머무르곤 했습니다. 어디 해어진 곳이 없나 살피느라고요. 더 이상은 나를 허투루 다루면 안 되겠더군요. 어쩌면, 해진 옷가지를 꿰어줄 이가 더는 없을 테니 그래야만 했을지도요.

항간에는 올곧은 마음으로만 살다가 밑진 이들이 숱하더군요. 나를 포함하여. 그러니 이젠 억지로라도 멈춤의 이유를 부여하여 삶에 쉼표를 만들고, 아무 연고도 득도 없는 망중한을 즐기곤 합니다.


좋아하는 과일이 무어냐 묻기에, 여름 한철 나오는 연두사과라 했습니다. 참 너답다, 하더군요. 퍼석하고 단맛도 부족한. 찰나의 한철 말고는 진심일 수 없는 사람. 한 계절을 앓고 나면 쉽게 놓치고 마는 사람. 나머지 계절에는 기꺼이 잊히고자 하는 사람.


삶이 그저 성가신 손 거스러미 같다 느껴졌습니다. 공들여 다듬어 보지만, 그런 나를 조롱하듯 금세 까끌거리고 마는. 비루한 삶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것에 낯을 가렸던걸 보니, 그런 삶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쁨을 받기 위해 애쓰지 않았습니다. 원체 잘 꾸미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다채로움 속에 공존하고 싶었던 이에게 난 늘 무채색 사람이었습니다.


닦아도 금세 다시 김이 서리는 욕실의 거울처럼, 속내가 온통 뿌옇더군요. 도무지 마뜩잖은 그런 탁한 삶에 마음이 쉬이 물러졌기에, 그것만으로도 도망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안녕을 하고, 나는 고작 다시 내가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값이 매겨지는 생의 조각. 그 작은 조각들마저 켜켜이 쌓아오던 삶이었는데, 그에 대한 대가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라니. 나 스스로에게 무안해서, 내가 나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은 것들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네요.


나머지 계절에는 기꺼이 잊히고자 하는 사람 / Dazaihu, Japan


나는 여전히 음식도 사람과의 관계도 잘 소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이 자주 습해져 질펀한 심연으로 미끄러지곤 합니다. 마음을 파삭하게 말려줄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도 구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그저, 인생은 마음이 젖은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반복인가 보다, 합니다. 습한 날에는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마음의 환기를 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습니다.


마음의 환기를 하는 것 / Tokyo, Japan


내 삶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살폈습니다. 당신 삶의 사분의 삼 지점쯤 인 것 같네요. 짐짓, 당신도 이렇게 아팠을까요. 어쩌면 당신조차도 잊어버렸을 당신의 아픔을 나 혼자 추적해보다, 그만 마음이 시큰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했던가요. 꿈결에서 본 당신의 안색이 현실에서보다 더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어쩐지 그런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더군요. 그래도 이 세상이 당신의 하늘보단 살만한가 보다 해서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하면 당신은 나를 밀어낼 것이고, 나 혼자 살아있음이 당신에게 조금은 덜 절절해 보일 테니.

당신 삶의 사분의 사 지점에서 조금만 더 살아보다, 사는 거 별거 없다 느껴질 때 당신 곁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야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나머지 삶을,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밤.

당신이 내 곁에 있어줘서 깬 채로 꿈을 꾸는 듯했습니다.

당신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 Fukuoka,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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