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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 Placid Sep 08. 2020

의자를 내어주는 서점

나의 준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모르겠더랬다. 세상에 나가고 싶었다. 세상이라는 돌벽으로 나를 몰아붙여 호되게 부서져본다면 알게 되려나. 기꺼이 이전의 나는 아주 잊겠다고, 모쪼록 내 시선을 오래 잡아끄는 것들을 찾고자 떠난 여행이었다. 무엇을 얻으려 나선 길은 아니었던 것. 아직 건재한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조금은 어설픈 방식으로 시작한 여행이었다.


그렇게 향한 곳, 포틀랜드.

대개의 날들이 비가 오고 자욱한 잿빛의 도시라니. 자유롭고 서정적인 히피의 도시라니. 무엇보다 한 블록을 통째로 차지한 규모의 독립서점이 있는 곳이라니. 나는 그 도시가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말이 안 되게 빈틈없이 나와 포개지는 그 도시에서, 나는 최소한 겉도는 불청객은 아니었을 터.


아주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 도시로의 여행은 단풍잎이 구르던 때에 시작되어, 그다음 해의 단풍이 다시 물들어가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이전의 나는 아주 잊겠다고 / Portland, USA



그리고 그곳엔 당신이 있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당신이 온다는 것은, 당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오는 것이었으므로. < 방문객 - 정현종 詩 >


나의 준코. 그리움의 열병을 심하게 앓던, 나와 닮은 당신이었다. 어느 한켠에는 긁힌 자국이 한가득이었다. 누가 너를 그렇게 상하게 했을까. 서걱대는 마음을 욱여넣고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쓰라릴 것이라면 더는 건드리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긁힌 자국이 희미해 보이도록 슬며시 안경을 벗어두는 정도로만 해두었다. 안경이 불편해 애를 먹었다며 싱거운 소리도 해보았다.


당신을 세상으로 내어놓은 그 도시는 어쩌면 그리도 예쁘던지. 신기루인가 했다. 당신이 묻어나는 바람을 도시에 가두고, 그 바람을 덮고 잠을 청하던 낭만의 날들. 사방이 막힌 유리상자에 넣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

한철 머무는 마음이 아니라, 그럴 수만 있다면 마음을 판화로 새겨두고 싶었다. 감정이 메말라갈 때 언제든 찍어내면, 구태여 누군가를 다시 곁에 들이지 않고도 시들지 않는 일상이 될 거라는 생각에. 

쌓이는 마음을 툭 분질러 그 반절을 마음이 베인 누군가와 나눠가져도, 이미 고봉 가득한 마음이었다.



누가 너를 그렇게 상하게 했을까 / Portland, USA



얄궂게도 아름다움으로 절여진 시간은 빠르게 흩어진다.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시간과 사투를 벌여서라도 몇 개의 순간만큼은 놓치지 않았을 텐데. 시공간에 빠져 허우적 댈 때면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길을 잃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다.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몰랐기에. 우리의 시간이 무정하게 흘러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는 수밖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더랬다.

타인의 시간이라도 빌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과정이야 어떻든, 어떻게든 우리의 시간을 유예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찬찬히 서로를 내다보고 살피고자 했다. 이리저리 엉킨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그 일부를 풀어놓을 수 있을 때까지만 이라도.

내 가진 전부를 쥐어줘도 여전히 가득했던 날들은, 그렇게 다시금 허기진 날들과 자리를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끝없이 지속되는 여행이란 있을 수 없기에, 어느덧 조금 길어진 그 여행의 끝에 닿았다. 비가 그친 후의 무지개가 유난하던 도시. 평생 만나야 할 무지개를 단숨에 만났던 시절. 그 시절의 기억은 늘 마음에 고여있다. 전에 없던 호수가 마음 안에 생겨난 것은 그 여행의 순기능일 터. 바람 한점 없이도 무지개 걸린 내 마음의 호수는 이따금 거세게 일렁인다. 아무렴 어때. 너무 잔잔하기만 하면 오히려 이상할 테니.



전에 없던 내 마음의 호수 / Portland, USA



여행은 결국 그 끝에 한 권의 책을 얻는 일이 아닐까. 그 자신만이 해독할 수 있는 비밀스러움이 가득한. 여정이 뭉쳐진 책장을 덮거나 펼치면서. 책장으로 넘겨지는 것은 활자가 아니라 삶의 한 귀퉁이일 테고.


낱낱의 장에 삶의 냄새가 배어있기에, 새 책의 냄새는 그토록 진하게 코끝으로 스미는가 보다. 나는 그 냄새에 쉽게 취하곤 한다. 이것은 여행지에서 굳이 다 읽지도 못할 새 책을 사는 내 나름의 이유이다.



한 권의 책을 얻는 일 / Portland, USA



포틀랜드를 가슴에 품고, 아직도 환절기가 되면 감기처럼 그 도시를 앓는다. 면역이 생겼을 법도 한데 마치 그 도시마냥 이질적인 질환인 것인지,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들어 기어이 내 마음을 데우고 간다.

그리고 그 도시가 만들어준 꿈을 상기시킨다. 그 도시에 있던 서점을 십 분절 한 정도만큼의 작은 독립서점을 하나 차리는 꿈. 서점 바깥에는 누구나 앉아 쉬어갈 수 있는 의자가 가득 놓여있어야 할 것이며,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고양이 한두 마리만이 반길 테니 사람의 시선에 대한 부담 없이 얼마든지 들락거려도 괜찮을, 그런 서점.

가을의 초입. 나는 또 한 번 마음을 앓고, 그 꿈에 의자 하나를 더 보탠다.



그대. 훗날 혹시 길을 걷다 의자가 한가득 놓인 곳이 있거든, 주저하지 말고 편히 앉아 쉬었다 가세요. 혹시 의자가 젖어 있거든 잠시 안으로 들어오셔도 괜찮아요. 히피 같은 차림새를한 사람 하나가 글을 읽거나 쓰고 있거든, 그게 나인 줄 알고 알은체 해주세요. 걷는 동안에 지쳤을 그대에게 내 품을 잠시나마 내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 꿈에 의자 하나를 더 보탠다 / Portland,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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