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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 Placid Nov 09. 2020

당신은 마냥 별처럼 거기 있어라

그 향기를 차지하고선

 

사랑을 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어느 쌀쌀한 날에 덥혀진 방안 가득 귤향이 들어차듯, 그렇게 사랑이 왔다고 했다.


알은체 하지 않으려 했으나 알아챌 수밖에 없는, 귤향처럼 사방으로 퍼진 마음. 마음을 허공에 매달아 놓을 순 없는 노릇이니. 그 농밀한 향기를, 아니, 사랑을 들이켠다. 이내 흩어지거나 사그라질 것을 어림하면서도, 그 헤아림마저 삼켜버리면 그만. 마음도 어쩌지 못해서 어쩔 수 없어지는 것. 애써한 일이 아니라 부유하던 향이 스며들어, 마침내 마음이 일을 하기 시작한 것.


다만, 공허하던 마음에 취기라도 오르면 어쩌나. 지레 염려한 탓에 마음이 쓰다.




실체가 없기에 뭉근한 향기로 움트는.



덥혀진 방안 가득 귤향이 들어차듯 / 로라마을, 시드니



사랑을 한지 두 해 째라고 했다. 이제 사랑을 다 써버렸다고 했다. 써도 너무 써버렸단다. 눈빛이 헐렁해져서는 해진 감정 부스러기들이 자꾸만 샌다. 마음을 다 쓰면 사람의 한 구석이 파이는 것일까. 사랑을 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형상. 그 어느 한 구석은 명도를 달리한다.


한 사람이 마음에 못 박히듯 박히는 건 찰나. 있는 힘을 다해 빼내는 데는 몇 개의 계절. 상흔이 아무는 데는 지구 몇 바퀴의 공전. 그럼에도. 어느샌가 무뎌져 이젠 견디겠는 만큼의 시간을 배겨낸다 한들, 살아있는 한 계속 남을, 이다지도 아린 당신의 자국.


마음에 밀어 넣은 사람이라는 못은 한 사람의 가슴께를 갈라지게 한다. 갈라진 틈 하나로 세상 모든 찬기가 스며 마음의 온도를 떨어뜨리니, 누군가를 마음에 새기고 사랑하는 일은 추운 일이겠다.




마음을 털어내면 한 줌 한기는 가시려나.



사랑하는 일은 추운 일이겠다 / 로라마을, 시드니



무던히 걸음을 잇대어 한 사람을 항해 내달리다, 감정의 정처를 알지 못해 멈칫하는 순간. 한걸음 더 가면 향기로라도 닿을 수 있을 것 같고, 그 한걸음 때문에 다리가 혹은 마음이 툭 부러지는 사달이 날 것도 같아서. 다시금 정반대의 방향으로 뭉그러져 되돌아오다,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러 간다 해놓고는 흐무러지거나 멍이 들어왔으니. 사랑을 파내려고 했던 것인지, 되려 내가 파인 건지.


가던 걸음 멈추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탁한 구름이 제법 빠르게 흐른다. 이 생에서 어떤 인연의 잔재들 또한 지나갈 것이다. 사무치는 것은, 고이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속뿐이니, 다음 생은 잠시 머무르다가 갈 뿐인 향기로 살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그 향기를 차지하는 것은 당신이었으면 한다. 나 훗날 진한 향기 범벅되어, 지나가는 바람에라도 얹혀서 당신에 가 닿을 테니. 온 천지 향기 날리며 당신에게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니. 그날이 오면은, 당신은 이것만 약속해라. 당신은 마냥 별처럼 거기 있어라. 그저 가만히 머무르기만 해라. 향기로 조금만 더 보듬어 안자.




마음도 흐드러지는 아련함으로.



그 향기를 차지하는 것은 당신이었으면 한다 / 로라마을, 시드니



우연히 발견한 기억 없는 날의 기억 없는 기록.


감히 당신을 담을 말이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온통 당신 덕분이므로.


그때 난 어떤 심정이었을까.


기껏 한 사람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가슴에 담고 살면서도, 사람과 사람으로 만난 이 생의 순간들이 꽤나 근사하게 새겨지기를 바라니까. 마음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면서도, 안고 가면 그만인 게 마음이기도 하니까.


어디에든 마음 걸치고 치대며 어떻게든 남은 생을 살아내야 하겠는데, 역시 사람만 한 건 없구나.


하나의 인연을 겨우 지나서야 건져 올린 마음 한 꼭지. 당신이 얼마나 귀한지. 그때 난, 오직 당신 하나 때문에, 어쩌면 이 생을 잘 살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심정이었을 것. 단 세 줄의 짧은 끄적임으로도 마음을 베껴놓기엔 모자람이 없는 시절이었을 것.




그래. 나를 살게 하려고 마음이 애써주었던 거야.



당신이 얼마나 귀한지 / 로라마을,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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