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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경 Jul 14. 2024

언더독의 스타트업 이야기(2)

부족하지 않게 먹고 살만한 중소기업 사장을 목표로 창업을 했다가 스타트업을 만나고 180도 바뀐 인생 이야기(2)


1편 다시 보기


* 번외 편은 본 편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시점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과거의 일들입니다.



Connecting the Dots


"지금 여러분은 미래의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단지 현재와 과거만을 연관 지어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은,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든 연결된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스탠퍼드 졸업식 축사에서, 스티브 잡스



번외 편 1 :  아무리 그래도 IT를 뜬금없이 시작해서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려운데요?


흔히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고쳐야 할 것이든,


나의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시고 대기업 공채로 입사하셨다.

처음에 영업으로 입사하셨던 아버지는 90년대 초반,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그 시대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전산'으로 전직하셨다.

모든 것을 수기로 하던 업무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였고

아버지의 한 발 빠른 움직임은 옳았다.


당시에 대기업들은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을 추진하였고,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전 분야에서 정보시스템의 통일화를 이루면서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며 가치를 창출하고자 했다.


그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아버지는

영업 - 전산팀 - 인사 - 데이터센터를 거쳐 그룹의 최연소로 임원이 되셨고,

마지막에는 CIO 역할을 맡게 되셨다.


최연소 임원이 되어 신문에 나온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아직도 그 신문 기사는 스크랩되어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아버지 덕분에 나는 엄청나게 어린 나이 때부터 컴퓨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286, 386, 486 PC를 모두 경험해 보았고,

5.25인치, 3.2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였으며,

1994년도에는 모뎀을 통해 하이텔과 천리안을 통해 PC 통신을 이용했으며,

후에는 잠시 시대를 스쳐 지나갔던 통신 기술인 ISDN이 집에 설치되었고,

MS-DOS, Linux, Windows 3.1, Windows 95 등을 사용하며,


당시의 발전하던 모든 OS를 경험해 봤다.


하이텔, 천리안 채팅방을 들어가 내 나이를 얘기하면 그 누구도 믿지 않았고

주위 친구들 중에서는 대부분 PC가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아주 어렸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또는 동네에서

특정 분야에 대한 일을 주위의 평균보다 좀 더 잘해서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사실 진짜 천재가 아닌 것이 대부분이지

어린 나이에 우리들은 뭐가 되었건 그들을 천재라 불렀다.


컴퓨터의 천재, 주변에서는 나를 그렇게 칭했다.


당연하게도 컴퓨터 하드웨어의 분해와 조립은 늘 하던 나의 놀이였고

Basic, C 언어를 통해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정보올림피아드를 준비하였고,

다른 지역의 소위 컴퓨터 천재들과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와 같은 PC통신을 넘어,

대학, 회사, 개인 등이 운영하는 형태의 사설 BBS에서 활동을 하고

정보올림피아드를 준비하던 친구, 형들과 함께


오픈소스 머드게임(현 온라인 게임의 시초, 텍스트 기반)인

무한대전 서버를 열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이러한 코스를 밟고 있는 우리들은

중고등학교를 거쳐 카이스트에 진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것이 더욱 좋았던 나는

컴퓨터는 이제 더 이상 재미가 없었졌고,


늘 방에 앉아서 검은 화면에 커서를 띄우고

하루종일 보내는 게 싫어졌다.


그렇게 컴퓨터를 접었고

16년이란 세월을 흘려보냈다.


사실 본 편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하면서 전지에 의식의 흐름을 정리하던 중에


'내가 잘한다고 주변에서 칭찬을 들었던 것'이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때 컴퓨터도 있었다.


중학교 이후 16년 동안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고,

앞으로 삶에 등장하지도 않을 것 같이

스쳐 지나갔던 컴퓨터에 대한 과거의 경험이

16년 만에 30세가 된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전혀 모르던 사람이

IT를 시작해서 빠른 속도로 전문가로 인정받기까지는 진정으로 어려울 것이다.


16년 전의 잊혔던 경험이 현재로 연결되었고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IT 기술들을 공부할 수 있었다.




번외 편 2 : 천국에서 지옥으로, 그리고 미친 짓들의 시작


닷컴버블,

인터넷 관련 분야가 성장하면서 우리나라의 주식 시장이

지분 가격의 급속한 상승을 본 1995년부터 버블이 붕괴된

2001년까지 걸친 거품 경제 현상을 뜻한다.


나는 대기업 공채 출신의 임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유년시절을 쭉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가 회사를 나와 사업을 시작하셨고

닷컴버블의 붕괴와 함께 모든 재산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사업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다.

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파산을 하실 정도로 어려워졌다.


당신은 집에 쌀이 없다는 것이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했는가?


아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정말로 쌀이 없었다.


보통 사회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던 학생시절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1)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거나

2)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삐딱선을 타버리거나


나는 2번의 선택지를 향하고 만다.


성적은 전교 500등 정도가 떨어졌다.

이제는 OMR 카드답안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고전명작 영화 비트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미친 듯이 놀고 싶었다.


그런데 놀고 싶어도 돈이 없는데 어떡하지?


지금은 찾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고속터미널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지갑을 잃어버려서 혹은 어떠한 핑계로

차비를 조금씩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실행해 보자.

어차피 내가 잃을 건 더 이상 없다.


"제가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잔돈 있으실까요?"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런데 천 원만 주실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안 좋았다.


손사례를 치거나, 이상한 사람을 보듯이 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이상한 사람일 수 있으니...


'이상한 사람?'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보여줄 만한 무엇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거절당하지 않을까?'


고속터미널로 가서 관찰을 시작했다.

계속 보다 보면 나 같은 행위를 하는 어른들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보았다.


어떤 이들은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면서 뒷주머니의 지갑을 잃어버렸고

집에 돌아가서 갚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그래! 바로 저거야."

"이상한 사람이 아닌 것을 증명하면 되지!"


유레카를 외치며

벌거벗은 채로 목욕탕을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 마냥

신이 난 채 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교복을 입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내 얘기를 들어주는 분들이 많아졌고

작게나마 빈 손으로 돌아오는 날은 없었다.


이는 어려웠었던 23년 전의 일이었지만,

거짓말을 했던 당시의 나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도와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려고 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나랑 같이 놀던 친구가

마술을 하는 것을 보았다.


손기술로 하는 동전마술과 카드 마술이었는데

굉장히 신기했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J야! 너 마술 진짜 잘한다. 어디서 배웠어? 나도 알려줘."


"알려줄 수는 있는데 안다고 되는 게 아니야

연습을 엄청 해야 돼! 나는 매일 연습해서 이 정도거든"


내가 몇 번 시도를 해보았는데

이건 안다고 바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J야! 내가 생각이 있는데 너는 마술만 보여주면 된다"


"뭔데 그래? 이상한 거면 안 한다."


"일단 따라와 봐"


학교가 끝나고 J를 데리고

나는 고등학교 지척에 있는 근처 대학을 갔다.


가까운 미래에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되실

아주 훌륭한 대학생 형누나들이 늘 지나다니고 있었다.


일단 들이대보자.


"안녕하세요. 형, 누나!

(교복을 가리키며) 저희는 바로 요 옆에 있는 S고등학교 마술부입니다."


당연하게도 나는 마술부가 아닌 미술부였다.

그리고 우리 학교는 호그와트가 아니었기에 마술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술부든 마술부든 '이'다르고 '아' 다른데 뭐가 대수겠냐

나의 아이디어를 검증해보고 싶은 마음 뿐이였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저희가 지금부터 몇 가지 마술을 보여드리겠습니다."


J에게 눈짓한다.


'시작하자'


손은 눈보다 빠르다.

J의 동전마술과 카드마술은

미래에 교사가 되실 형님누님들로부터 감탄과 박수를 이끌어냈다.


그래! 바로 지금이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재밌으셨나요?

남은 하루도 지금처럼 웃으면서 보내실 수 있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희 마술부에서 축제를 위해

마술비품을 구매하려고 하는데 혹시 주머니에 남는 동전을

나누어주신다면 저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등가교환,

서비스와 화폐가 교환되는 일


우리의 길거리 즉흥 마술쇼는

지친 하루를 보내던 거리의 사람들에게

웃음과 활력을 주었고


그 대가로 500원부터 몇 천 원까지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돌아다니면서

진행했던 길거리 마술쇼는 오픈 첫날 대박을 만들었다.


5만 3백 원..


23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숫자이다.


J와 나는 성공적인 오프닝 쇼를 마무리하고,

지하철 보관함에 교복과 가방을 벗어던지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놀러 갔다.


흥행을 이어가던 우리의 쇼는

같은 지역에서 계속하다 보니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도 생기고

소위 말해 쪽 팔리는 상황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더 이상 이 동네에서는 못해먹겠다.


시장 확장 전략,

그렇게 우리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 중심으로

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원정을 나가는 시기에는

나 역시도 마술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로 손기술이 향상되었고

솔로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며 소액을 벌고

그 돈을 쓰고 하루살이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현타가 왔다.


노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재미가 없었다.


그러면 돈을 쓰지 말고 모아보자.


서울을 돌며 진행했던 길거리 마술쇼로 돈을 모았고

나를 꾸미기 시작했다.


온라인 패션 커뮤니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나우누리 패게(패션게시판)의 오랜 활동 경험이 있었고,


현재는 없어진 압구정 맥도널드 앞 자판대에서 팔던

일본 패션 잡지 멘즈논노를 통해 꾸준히 패션에 대한

관심과 눈을 키워왔던 나였다.


당시 유행하던 압구정 멀티숍을 비롯하여

밤이 되면 화려한 네온사인과 함께 인파가 몰렸던

동대문 거평프레야, 밀리오레에서


신발과 옷도 사고 구경도 하고

친해진 형들과 거평 타가 디스코에서 죽 치며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대문 유통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트렌디한 새벽시장이라 불리었던

광희, 제평(제일평화) 시장에서 미로와 같은 상가를

몇 시간씩 누비고 길도 잃어버리고 하면서

사람들한테 먹힐 같은 옷과 가방 등을 산 뒤


인터넷 패션 커뮤니티인 나매(나이키매니아), 스콜(스니커콜렉션), 힙합퍼를

포함한 온라인에 팔기 시작한다.

길거리 마술쇼와는 비교도 안되는 높은 수익률이였다.


엄청난 난이도의 미로와 같이 복잡했던 새벽시장의 구석구석을

눈을 감고도 자연스럽게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하루살이처럼 느끼게 만들었던

길거리 마술쇼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먹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1)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거나

2)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삐딱선을 타버리거나


나는 두 가지 선택지에서 2번을 선택했고,

그러한 결과로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철면피와 더불어 E가 100%로 나오는 ENTJ 성격이 만들어졌다.


또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나의 서비스를 매력있게 전달하면서

고객으로 만들며 이어가는지에 대한 영업적 경험을 일찌감치 얻을 수 있었다.


과거 인생극장이라는 드라마 형식의 예능이 있었다.

A와 B라는 선택지를 놓고 주인공이

"그래! 결심했어!" 라고 외친 뒤

선택한 결과에 따른 각각의 미래를 보여주는 컨셉의 예능이었다.


보통 A와 B 중에 하나는 나쁜 결과의 선택지였고

나머지 하나는 좋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내가 컴퓨터를 계속했었더라면,

우리 집이 망하지 않고 계속 잘 살았더라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갔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

더 나은 현재가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생각들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과거를 후회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선택의 기로 속에서도 알 수 있다.


Connecting the Dots


인생에서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어린 시절 유복했던 가정,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겪은 가난,

이로 인해 생겨난 절실함


그리고 놀고 싶어서 돈을 벌고자 했던 미친 짓들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했었던 행동들,

이러한 점들이 모두 모여 현재와 미래로 이어져있다.




적당히 먹고살만한 중소기업 사장을 목표로 30세에 창업을 한 순간을 거쳐,


현재 패파에서 투자하는 신사업인

파이브클라우드와 하이픈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나는 우리팀과 회사의 동료들을 그 누구보다 믿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우리가 노력을 퍼부어도 때론 실패를 피해갈 수 없다.

하지만 작은 성공 경험들도 쌓인다.


이러한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모여

더 큰 성공을 향한 오늘과 내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번외 편 끝.


(3편에서 계속)

https://brunch.co.kr/@kwk0329/4


링크드인 : https://www.linkedin.com/in/wookyung-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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