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그릴 때
오랜만에 일본의 색채 심리학자 스에나가 타미오 박사님의 세미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는데, 박사님의 강의 내용과 관련하여 어두운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 대한 사례를 듣는 과정에서 그동안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떠올랐다.
스에나가 타미오 박사님의 색채심리를 10여 년 전부터 배워왔던 나는 아이의 파괴적인 그림, 폭력적인 그림에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박사님은 그런 어두운 그림을 그림으로써 오히려 아이가 마음속의 갈등을 해소하고 성장하는 것이니 크게 걱정하는 것보다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하신다.
지금은 군대를 다녀오고 어엿한 성인이 되었을 성준이는 11살에 나를 만났다.
같은 학년이었던 여학생 민희는 성준이가 다닌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랐고 성준이의 일화를 들려주며 나를 잔뜩 겁먹게 했다.
나는 속으로 '그 아이가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주먹으로 때리면 어떡하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나도 어렸나 보다.
한 번은 성준이가 동생을 때리는 팔의 각도와 세기를 보며 그동안 아이들을 어떻게 때렸을지 상상이 됐을 정도로 아이의 파워는 대단했다.
다른 아이들이 성준이를 무서워하기에 나는 어머님께 정중히 단둘이 수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님은 수락을 하셨고 그 이후 3개월 간 단둘이서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먹은커녕 전설의 고향 스토리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유머를 발산하며 그림을 그렸다.
성준이의 초반의 그림은 바다와 관련된 주제를 그리면 상어가 물어서 핏물 바다로 변해가는 모습, 도시와 관련된 주제를 그리면 빌딩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는 장면을 아이답지 않게 그려냈다.
나는 성준이 앞에서는 당황하거나 왜 이런 그림을 그리냐고 핀잔을 주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미술치료와 관련된 책, 아동미술심리와 관련된 책을 사들여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아동심리, 심리학, 미술치료 등에 빠져들어 깊이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준이와의 만남이 공부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계속 머릿속에서 이러한 질문이 맴돌았고, 성준이의 그림을 해석하고 싶었다. 그 아이의 마음이 너무 궁금해서 한동안 책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책 속의 이론들이 공통적으로 알려주기를 '두려움'이었다. 성준이는 무엇이 두려웠을까? 매 수업시간마다 많은 대화를 나누며 점점 친해져 갔고 드디어 성준이가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 난 네가 때리는 모습 상상이 안 가는데?"
성준이는 자신이 때리지 않으면 맞을까 봐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주먹으로 때린다 했다.
성준이와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은 우리가 말하는 '나쁜 행동'을 하는 무리였고 그 속의 일원이었던 성준이는 무리 속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래야 맞지 않을뿐더러 남자아이들 세계에서 강자이고 싶었을 테니까.
나는 성준이가 먼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다려주었다.
그러기까지 어두운 그림을 꽤 그렸다. 두려움과 갈등 등 불편했던 마음을 해소했던지 어느 날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를 때리고 상처를 입히는 아이였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두려웠을까?
한 동안 폭력이 난무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해소하고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성준이와 같은 학년 학생에게 성준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물어봤다.
"걔 요즘 조용하고 애들 안 때려요."
어느 날 성준이가 하교 후 가방을 책상 위에 던지며 말했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왜 하필 무궁화였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성준이가 이전과는 다른 주제를 스스로 생각해 왔다는 것에 흥분하여 무궁화 자료를 열심히 찾아 그 아이가 그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었으니까.
주먹을 휘두르는 아이가 아닌 무궁화를 그리는 아이
다른 아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웃을 때 눈이 초승달이 되는 매력적인 아이였다.
지금은 어떻게 성장해 있을지 많이 궁금하고 만나고 싶다.
여기서 어두운 그림이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그림을 말한다. 심각하게 폭력적인 그림이라면 전문상담을 받는 것이 좋으며, 되도록 미술치료 쪽 전문가를 만나는 것이 좋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십 대로 접어들면 마음속에 많은 갈등이 생긴다. 친구와의 문제, 부모와의 갈등,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등을 파괴적인 그림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 갈등 안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아나가면서 독립적인 아이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갈등은 아이에게 심리적 고통일 수 있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그림이든 음악이든 글이든 아이들은 다양하게 표현하고 발산한다. 아이가 어두운 그림을 그릴 때는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이의 그림이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그 그림을 통해 '무엇이 두려웠을까?', '무엇이 힘들었을까?' 아이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먼저이다. 불편한 그림은 '내 마음을 알아주세요!'라는 SOS 신호임을 알아두자!
마음 안의 여러 가지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는 중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두려움의 존재가 있는지 확인 필요
그림으로 충동적인 감정을 조절하고 해소하는 중
게임 속의 장면을 연상하여 그리는 경우도 있음(게임에 심하게 빠져있는지 확인 요망)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알아달라는 신호라는 것을 알아두면 좋겠다.